매일신문 테마리그 투·타 4관왕 기염…사회인야구 고수 류성일씨

입력 2011-01-10 07:46:07

20여 년째 사회인야구선수로 뛰고 있는 류성일 씨는 겨울에도 틈틈이 공을 던지며 야구 감각을 유지한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20여 년째 사회인야구선수로 뛰고 있는 류성일 씨는 겨울에도 틈틈이 공을 던지며 야구 감각을 유지한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류성일 씨가 2010년 매일신문사장기 테마리그 야구대회에서 받은 개인타이틀 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류성일 씨가 2010년 매일신문사장기 테마리그 야구대회에서 받은 개인타이틀 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어떤 종목이든 엘리트 선수 못지않게 실력을 갖춘 생활체육인들이 있다. 타고난 체력과 기술, 여기에 노력이 더해져 빼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그야말로 숨은 '고수'이다. 사회인야구에서는 류성일(51) 씨가 '고수'로 대접받는다. 류 씨는 2010년 매일신문사장기 테마리그 야구대회에서 4관왕에 올라 사회인야구 스타가 됐다. 실버리그 로얄슬러거의 에이스인 그는 다승왕·탈삼진왕·평균자책점왕 등 투수부문에 걸린 3개상을 모두 휩쓸었다. 또 빠른 발과 뛰어난 야구센스로 도루왕까지 거머쥐었다.

◆나이도 비켜간 야구광(狂)

류 씨는 군 복무를 마친 뒤 사회인야구에 입문해 20여 년째 그라운드를 지킨 탓에 아는 사람이 많다. 무엇보다 실력이 뛰어나 그와 같은 편이 됐든 상대편이 됐든 경기를 한 번 하고 나면 그를 기억하게 된다. 삼성 라이온즈의 새 사령탑에 오른 류중일 감독의 친형이라 점도 그의 이름을 잊지 못하게 한다.

"야구는 제 인생에서 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릴 때는 직접 야구를 했고, 이후에는 동생이 야구선수생활을 한 덕분에 늘 야구에 관심을 뒀죠. 항상 제 옆에는 야구공이 있었고, 그 공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오랜 친구처럼 가까워졌죠."

올해 나이가 만으로 쉰 하나. 야구를 하기엔 다소 부담스런 나이지만 류 씨는 야구를 할 땐 나이를 잊는다. 마운드에 섰을 때 위용은 20, 30대 젊은이 못지않다. 아마추어 선수로는 보기 드문 120km 이상의 직구를 장착하고 있다.

"변화구로 카운트를 잡고 승부처에서는 직구를 던집니다. 아직은 정면승부를 해도 지지 않을 만큼 힘이 있습니다."

류 씨는 테마리그 10경기에서 9승1패라는 믿기 힘든 성적을 거뒀다. 매 경기 3, 4이닝을 던져 모두 38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타석에서는 주로 1번 타자로 나와 팀의 공격 물꼬를 텄다. 시즌 초반에는 중심타선에 배치됐으나 득점력을 높이기 위해 1번 타자를 자청했다. 또 루상에 나가면 베이스를 훔쳤고, 26개의 도루를 성공해 리그 1위에 올랐다. 류 씨는 팀원들과 손발을 맞춰 테마리그 출범과 함께 창단한 로얄슬러거를 첫해 리그 정상에 올려놨다.

◆야구선수가 될 뻔했던 기억

류 씨는 동생 류 감독보다 먼저 야구공을 잡았다. 포항중앙초교 4학년 때 류 씨는 야구부에 발탁돼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3세 아래인 류 감독은 1학년이었다. 내야수를 보며 야구 잘한다는 말을 들었던 류 씨는 6학년 때 뜻하지 않은 계기로 야구를 그만두게 됐다. "감기 몸살로 훈련을 며칠 거른 뒤 운동장에 나갔더니 감독이 바뀌어버렸어요. 새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3루 수비를 하러갔더니 우익수로 가라더군요. 당시 우익수는 후보군 선수들의 자리였죠. 그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물을 뜨러간다며 도망쳐 버렸죠."

그날 집에 돌아온 류 씨는 아버지에게 혼나면서 야구를 그만뒀다. 그 틈에 류 감독이 그를 대신해 글러브를 끼면서 형제간의 야구 운명(?)은 바뀌게 됐다. 다시 야구가 하고 싶었던 류 씨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를 하려 했지만 이번엔 축구가 유명한 동지중학교에 배치돼 야구를 하지 못했다. 대구중학교로 전학 와서는 야구부 훈련장을 기웃거리다 연습생이 됐지만 고된 훈련을 보며 기겁하고 야구선수의 꿈을 접었다.

류 씨는 "당시 대구중 야구부에는 이만수(SK 코치), 양일환(삼성 코치), 홍성규(대구MBC 해설위원) 등이 있었는데 덩치도 크고 실력도 뛰어나 기가 죽었습니다. 더군다나 엄격한 규율과 엄청난 훈련량을 보니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이 사라지더군요."

그래도 틈틈이 야구를 했고, 때로는 야구 잘하는 동생을 둔 덕분에 호강도 했다. 류 씨의 군 복무 시절 류 감독은 한양대에 진학해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 동생이 야구 장비를 한껏 짊어지고 면회를 오는 바람에 부대가 술렁거리기도 했다. 그 후 전투체육 종목이 축구에서 야구로 바뀌어 버렸다. "공병대와 월급내기 시합을 할 때였죠. 일병계급장을 달고 마운드에 올랐는데 평범한 타구를 선임병이 잡지 못해 고함을 쳤다 경기 후 내무반에서 혼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사회인야구는 1985년쯤 류 씨가 제대 후 집 근처 두류공원에 들렀다 우연히 시작하게 됐다. 팀원이 모자란 팀에서 우익수자리에 서 있어만 달라고 해 글러브를 끼게 됐다. 우익수에 8번 타자. 그러나 실력이 월등해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됐다. 그 팀이 구남인쇄소 팀의 전신이었다고 류 씨는 기억하고 있다. 그 후 사회인야구를 계속해온 류 씨는 아마추어 선수 출신들로 구성된 1군 무대에서도 맹활약을 했고, 매일신문사장기 사회인야구 1부 리그 우승을 두 차례나 이끌었다. 지난해에는 오랜 인연 끝에 만난 로얄슬러거 조성두 감독의 제안으로 실버리그에서 뛰게 됐다.

◆야구환경개선, 철저한 준비 필수

선수생활을 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지 류 씨는 평생 야구를 할 것 같다고 했다. "1980년대에는 사회인야구팀이 대구에 10여 개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야구 붐이 대단해요. 대표팀이 월드베이스볼클래식과 올림픽 등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TV에서 천하무적야구단이 인기를 끌면서 사회인야구 동호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났고 운동장이 없어 경기를 하지 못할 정도로 팀도 많아졌지요. 1세대로서 가슴 뿌듯하죠."

하지만 뜨거운 야구 붐을 따라주지 못하는 환경은 아쉽기만 하다. 야구를 하겠다는 직장인은 늘고 있지만 뛸 공간이 부족하다. 학교운동장을 빌리고, 도심의 빈 공터를 찾아 야구를 하지만 환경은 열악하다. 울퉁불퉁한 바닥은 항상 부상우려를 낳고 있다. 또 몸을 제대로 풀지 않고 재미에만 빠져 곧바로 운동을 하는 직장인들을 보면서 다칠까 걱정이 된다. "야구는 공을 던지는 것부터 기술이 필요합니다. 힘으로만 하면 어깨를 다치고, 슬라이딩을 잘못하면 발목, 인대 부상을 당하기 쉽습니다. 야구를 하며 어릴 적 한번쯤 품었던 꿈을 실현하고 무기력한 삶에서 활력과 희열을 되찾으려면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과 오랫동안 야구를 즐기고 싶은 류 씨의 작은 바람이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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