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옛 도심, 이야기로 살아나다] ②화가 이중섭과 백록다방

입력 2011-01-08 07:12:56

지인들 하나둘 떠나간 백록다방엔 베토벤이 '운명'처럼 흐르고…

그림: 김영대 화백
그림: 김영대 화백

"청매화였었다"고 했다. 대구 경복여관 2층 9호실에 처음 짐을 풀 때 복도에 놓인 화분에 눈길을 주던 중섭에게 여관 주인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은 "이제는 폐물이지만 한 때는 어여쁜 여인이었다" 라는 말처럼 들렸다. 밑둥이 말라 물을 퍼 올리지 못한다고, 주인이 버리려던 걸 중섭이 만류하여 방안에 둔 '청매화였던'나무에 물을 준 지 이십일이 지났다.

서울 미도파 화랑의 전시회 이후 좌절감에 휩싸인 채 술로 방황하던 중섭의 귀에는 몇몇 사람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이중섭이가 다 되었다" 구상의 권유로 대구로 와 최태응이 머물고 있던 경복여관 9호실에 짐을 풀 때, '청매화였었다'고 하던 주인의 말에서 중섭은 '제 몸속에서 아직도 청매화를 키우고 있는지 당신이 어찌 알어?'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이 나무가 죽은 건지 아직도 살아 있는 건지 알기 위해서라도 봄이 오기까지 물을 주어보자 했다. 그것은 중섭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희망이라는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간밤 술에 절은 몸을 일으켜 화분에 물을 줄 때면 기다림이라는 것, 그건 어떤 센티멘탈한 이념보다 위안을 주었다.

경칩이 지났음에도 경복여관 9호실의 중섭의 이부자리는 아직 떠나지 못한 대구의 마지막 겨울밤들을 한자리에 다 모아놓은 것처럼 추웠다. 손바닥만한 이부자리치고는 불공평한 추위였다. 추위에 몸이 오그라들 때면 마사코도 태현과 태성의 생각도 나지 않아 이런 추위, 이런 타관의 공기가 쓸쓸하고 허망했다. 새벽이면 잠속에서도 창밖에 떠도는 바람을 느꼈다. 바람은 문득문득 고드름처럼 가슴에 꽂혀 잠을 충분히 자 둔 것도 아닌데 금방금방 깨곤 했다. 잠에서 깨면 덫을 빠져나온 새처럼 팔딱팔딱 가슴이 뛰었다. 그럴때면 왼쪽 팔위에 오른쪽 가슴을 포개어 가슴 뛰는 소리를 들었다.

마사코의 작고 귀여운 발가락이 떠올랐다. "배니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빨게요"라며 웃던, 마사코의 송편 같은 입술이 생각났다. 태현과 태성이 하루하루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깝고 미안했다. 그럴때면 따스하고 여리고 보드라운 어떤 것이 슬며시 다가와 자신을 감싸안음을 느꼈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를 떠돌다가 어떻게 살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섭은 오래오래 그 기운에 몸을 맡긴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잠이 깨면, 대구의 아침은 다시 추웠다. 다행히 정오여서 중섭은 따뜻한 난로와 베토벤이 흐르는 백록다방으로 갈 수 있었다. 나가기 전 데운 물 다섯 숟가락에 수돗물 반 잔을 타서 화분에 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 없는 그의 삶 속에서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그의 삶에 작은 규칙을 주었다. 하루가 갔고 또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였다.

오늘이 며칠일까? 담뱃갑에서 뜯어 낸 은박지에 펜촉을 꼭꼭 누르며 중섭은 구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네 시에 온다던 구상은 오지 않았다. 오늘이 구상과 약속한 그 수요일인지 아니면 며칠 전 구상과 함께 한 자리가 그 약속 날이었는지 갑자기 확신이 서질 않았다. 오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걸까? 아니면 너무 늦은 시간인 걸까? 다시 살기엔 너무 늦은 시간처럼, 죽어버리기엔 너무 이른 시간처럼, 모든 것이 중섭에게는 이제 그러하였다.

중섭이 대구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지방의 예술가들이 그간의 예술적 허기를 채우려는 듯 너도나도 중섭에게 몰려들었다. 대구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이 서울로 떠난 직후였다. 결기 있는 예술가와 술을 마시며 예술로 하룻밤 농을 썰면 바로 예술가로 승격이 될 것 같은 예술가 지망생들의 허영심도 한몫하였다, 너도 나도 중섭을 술자리로 끌어 들였고, 굶주린 들개처럼 중섭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한바탕 기행을 토하고 난 후 포만감에 젖은 짐승처럼 자리를 떠났다. 중섭은 그 생의 마지막 축제를 벌이듯 두렵고도 지긋지긋한 술자리로 소일하느라 작품에 쏟을 육체와 정신을 탕진하였다.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그들에게 닿지 못하는 무력감도 그 향락에 일조하였다.

"형, 나 좀 보우. 내 피가 점점 묽어지고 있슴마. 저 갸륵한 동무들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나로 하여금 저들의 피를 수혈하고 있슴마." 중섭의 그런 자조 섞인 웃음은 태응으로 하여금 서글픔을 자아냈다.

시침이 네 시를 지나는 백록다방, 한 귀퉁이에서 구부린 채 은지화를 그리고 있는 중섭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뉴스에선 봄 소식이 들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내복을 들여놓지도 못하는 계절처럼, 저녁을 차리기엔 이르고 새로운 약속을 잡기엔 늦은 엉거주춤한 네 시처럼, 이제 서른 아홉이 된 중섭에게 1955년 대구는, 늦잠에 일어나 기지개를 켜자 태양이 땅으로 꺼질 준비를 하는, 투미한 계절의 오후 네 시 같은 시절이었다. 미도파 화랑의 상흔위로 중섭의 우울증이 뿌연 절망을 드러내며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몇 장만 모아 줍세."

중섭의 부탁에 답하는 백록다방 마담의 세련된 미소 속에는 쉽게 감지하기 어려우나 분명한 조롱이 묻어 있었다. 얼마 전 중섭이 찻값 대신 내민 은지화를 도로 밀며 "이 귀한 것을 제가 어찌요"라고 공손히 거절하던 여자였다. 그 거절 속에는 분명히 조롱이 포함돼 있었다. '차 한 잔, 담배 한 갑 사서 필 돈도 없는 주제에.'라고, 여자의 공손한 미소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구상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여자는 예의 상냥한 미소를 얼굴 가득 펼쳐 보이며 한 뭉치의 담배 속지를 곧 모아 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세심하고 배려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시키며 호기심 어린 눈을 굴리며 은지화를 즐거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상이 오기 전까지 요청한 은박지가 중섭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다방 문이 열리고 정장의 한 신사가 들어오자 여자는 보랏빛 칸나 같은 웃음을 만면하며 사내를 반겼다. 중섭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거두어버린 찬란한 웃음이었다. 여자는 신사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한참을 재잘거리며 알 수 없는 농을 주고 받았다. 카나리아처럼 높고 가는 목청에는 남자를 자부심있게 만드는 교태가 묻어있었다. 중섭이 남은 여백에 그림을 다 채울 동안에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설 기색이 없었다. 중섭이 일어나 옆 테이블 아래 휴지통을 뒤져 두 개의 백구 담뱃갑을 들어올리자 여자는 그때서야 생각난 듯 호들갑스런 표정으로 다가와 중섭에게 죄송함을 연발했다. 곧이어 여섯 장의 담배 속지가 중섭에게 전달되었다.

"고맙수다. 마담을 불편케 만든 건 내 병이 깊은 까닭이외다." 중섭의 억양에는 진실로 한 푼의 원망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투는 여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제야 여자는 몹쓸 잠에서 깬 듯 진실된 송구함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의 말투는 언제나 지극히 간결했지만 그의 말에는 툭 하고 마음을 풀리게 하는 마술 같은 애수가 있었고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우수가 있었다.

잠시 후, 자신의 냉대를 만회하기 위함인지 여자가 레코드판을 올리자 스피커에서 베토벤이 흘렀나왔다. 백록다방에 드리워진 자색 커튼을 휘감으며, 중섭의 텅 빈 뱃속으로, 점점 묽어지는 핏속으로 베토벤이 '운명'처럼 파고 들었다. 베토벤, 운명…. 이 고독하고도 기이한 아름다움이 품고 있는 감미로운 절망을 떠올리며 중섭은 최근 자주 죽음에 대한 유혹에 흔들렸다. 그러면 마사코와 태현, 태성의 얼굴이 호통처럼 떠올라 죽을 수도 없게 된 운명을 체념했다. 하지만 중섭은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본능, 격동하는 방종, 그것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이 걷잡을 수 없는 그리움의 넋을 이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중섭이 앉은 탁자 위에는 어느덧 게와 소, 닭, 벌거벗은 아이들의 아랫도리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으며 뒤섞여 있었다. 무구한 환희와 천진스러움으로 가득 찬 그림이었다. 고독한 화가의 가난과 절망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림은 그의 예술이 그의 현실 따위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순진무구한 미소처럼 그의 그림은 그의 현실로부터 독립된 백치와 고졸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섯 시가 지나자 중섭은 오늘은 수요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일이나 모레는 틀림없이 수요일일 것이므로 구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구상과 함께하는 온기 넘치는 시간이 잠시 연기되었다는 것에 대해, 중섭은 마치 귀중한 하루를 덤으로 선물받은 것처럼 위안을 느꼈다.

땅거미가 깔리는 향촌동 거리에는 희뿌연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해마다 더욱 추워지는 겨울이었다. 삼월의 진눈깨비 사이로 제주의 따스하고 부드럽던 바다가 하얀 연기를 일으키며 밀려왔다. 어지러이 찍혀진 태현과 태성의 동그란 발자국들 사이로 동백처럼 발갛던 마사코의 입술이 무어라 무어라 소리친다. "안들리우 남덕! 좀 더 큰 소리로 말하우!" "배니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입술이 빨갛다구요!" 중섭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다. 이제 돌아가야겠다. 너무 오랫동안 이 추운 거리를 걸었다. 누구나 한번쯤 다시 모든 게 처음이고 싶어질 때가 있듯, 중섭은 시대를, 생명을, 운명을 - 그 모든 것이 처음이고 싶어짐을 느낀다. 처음 잡은 마사코의 손, 그때 대추나무 잎사귀에 부딪히던 눈부신 햇살과 태현의 첫 울음소리, 갓 태어난 송아지 꼬리에서 풍기던 흥건한 양수 냄새... 이제 돌아가야겠다. 이 거리는 너무 추운 거리였다. 짙은 번트엄버의 저녁거리로 진눈깨비가 날린다. 나리는 진눈깨비 사이로 중섭의 눈에 새하얗게 꽃을 밀어올린 청매화가 환영처럼 떠오른다.

"참 아름답구나."

중섭이 중얼거린다.

꽃이 대답한다.

"아름답다고요? 그것을 피어 올리는 동안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중섭의 뺨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김계희 (그림달력 작가)

◇ 이중섭은?

한국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 이중섭은 1916년 4월 10일 평안남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1956년 9월 6일 타계했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 지도를 받았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문화학원에 재입학해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자유로운 경향을 공부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결혼해 원산에 살면서 해방을 맞았다. 1950년 겨울 남하하는 국군을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부산·서귀포·통영을 전전하며 피란살이를 했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에서 부두 노동을 하며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한 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빼고는 만나지 못했다. 1955년 겨울 혹은 이른 봄 중섭은 대구로 와서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미도파 화랑의 전시회는 성공적이었고 그림도 많이 팔렸지만 그림값이 제대로 수거되지 않았다. 그 돈을 모아 일본으로 가려고 했었기에 미도파 화랑의 전시회는 그에게 치료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안겼다.

그해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서울로 갔다.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