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향인사] 고기석 KAIST 감사

입력 2011-01-07 07:24:17

모든 면에서 정의 지켜지는 투명한 상아탑 만들고 실어

때로는 첫인상이 그 사람의 삶의 궤적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얼굴에 인생이 있다'는 말이 괜한 게 아니다. 고기석(53) KAIST 감사가 꼭 그랬다. 작지만 반짝이는 눈동자는 첫눈에도 수재란 느낌을 들게 했다. "내세울 게 없어 부끄럽다"며 내미는 이력서는 '심증'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경북고·서울대 법대·하버드 케네디스쿨 정책학 석사·박사 수료….'

"원래는 국문학을 공부할 생각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글 읽고 쓰는 걸 무척 좋아했거든요. 대학 입학 때 선친께서 저 몰래 법대에 원서를 내시는 바람에 법학도가 됐지만. 지금껏 써둔 자작시도 200편이 넘습니다. 언제 시집을 낼진 몰라도…."

아무리 노력해도 뜻한 대로만 풀리지 않는 게 인생이다. 그도 어쩌면 유학을 마치고 평범한 교수로 살았을지도 몰랐다고 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뒤 유학길에 올라 박사 과정까지 마쳤지만 갑작스레 가세가 기울면서 모교 강단에 서겠다는 꿈을 접어야 했다. "논문 제출만 남겨뒀는데 당장 가족들과 먹고살 길이 막막해졌죠. 마침 보스턴에 있는 로펌에서 제의가 들어와 기업 설립 및 해외 진출을 돕는 컨설턴트로 10년 넘게 일했습니다. 그때 미국 사회와 시스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됐죠."

그의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터닝 포인트는 2005년이었다. 양친이 함께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을 얻으면서 기업 컨설턴트로 잘나가던 그는 16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병 수발을 들었다. 그의 표현대로 '전혀 계획에 없던' 공직 생활도 시작됐다. 첫 출발은 외교부 외신대변인 겸 정책홍보팀장. 공군 복무 시절에도 국방부 공보통역장교로 일할 정도로 탁월했던 영어 실력과 연구 전문성이 밑거름이었다. 개방형 직위에 임용된 민간 출신이 흔히 겪는 조직 문화 부적응, 기존 간부들과의 갈등도 특유의 친화력으로 별 어려움 없이 극복했다. 국무조정실 특정평가국장·국무총리실 정책분석국장으로 근무할 당시 중앙인사위원회에서 '개방형 공직자 우수 사례'로 뽑힌 배경이다.

2009년부터 1년여 동안 청와대 대통령실장 부속실장으로 일했던 건 정정길 전 대통령실장과의 30년 인연 덕분이었다. "법대 선배이신데 제게 행정대학원 진학을 권하셨죠. 유학을 결심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엔 먹고사느라 전화 한 번 못 드렸는데 저를 찾으시더군요. 죄송한 마음에 눈도 못 마주치는데 '너, 웬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 알지' 하시더군요."

그는 3년 임기의 감사 재임 동안 투명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절차적 정의(正義)가 지켜지는 상아탑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실체적 정의뿐 아니라 정의로운 모습(appearance of justice)도 함께 갖추며 일하자'는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국내 연구 중심 대학의 대표 격인 KAIST는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미래 먹을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정부 예산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높은 신뢰가 중요합니다. 제2의 도약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라 생각합니다."

고교 시절 탁구선수로 뛸 정도로 스포츠를 즐기지만 골프는 바빠서 못 배웠다는 그는 성주에서 태어나 대구 중앙초교·중앙중을 졸업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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