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숨쉬는 우리 옛길, 그 찬란한 부활을 꿈꾸다
너도나도 걷기에 나서면서 길이 뜨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비롯해 영국의 내셔널트레일, 일본의 장거리자연보도 등이 대표적인 걷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수 년전부터 제주 올레길이 '대한민국 걷기 1번지'로 자리 잡고 있으며, 지리산 둘레길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전국 지자체들은 사람들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내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하지만 선조들이 걸었던 옛길을 걷는 사람은 없다. 우리나라의 옛길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탓이다. 옛길은 살아 숨을 쉬는 박물관이자, 역사와 문화의 길이다. 옛길을 걷는 것은 우리 국토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더 늦기 전에 옛길을 되살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북의 옛길들
조선시대의 옛길이란 지금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이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모두 열 개나 되는 큰길이 경로별로 자세히 적혀 있다.
경북지역 민초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남대로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서울~부산 신작로의 모태가 된 길이다. 하지만 일제강점 이후 신작로가 생기면서 이곳저곳 사통팔달 길이 뚫리면서 영남대로는 사람들의 발길에서 점점 멀어졌다.
영남대로의 출발점은 부산의 동래읍성이었다. 이어 삼랑진을 거쳐 밀양을 지나 청도에 이르러 팔조령을 넘으면 대구가 나온다. 대구에서 금호강을 건너면 칠곡과 구미다. 영남대로는 우시장으로 명성을 얻었던 구미를 지나 의성, 상주에 이른다. 상주를 지나면 점촌에 다다른다. 곧이어 주흘산 문경새재로 이어진다. 문경을 지나 충주 등을 거쳐 영남대로의 종착지인 숭례문에 도착한다.
영남대로는 옛날에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과거 보러 다니던 길이며, 부보상들이 괴나리봇짐을 메고 넘었던 길이었다. 또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걸었던 길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공로이기도 했다.
영남대로에는 재미있는 얘기도 많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죽령과 추풍령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영남대로는 일제 36년 간에 이루어진 철도와 신작로 개설, 근대 교통기관의 도입에 따라 기능을 점차 잃어버리게 됐다. 현재 영남대로는 문경새재의 조령관문 일대 4㎞ 정도를 빼면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영남대로 외에도 경북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어디에나 길이 있었다. 산이 많은 곳에서 살았던 경북 사람들은 고개를 넘나들어야 먹고사는 일이 가능했다. 고개는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는 실핏줄과 같은 역할을 했다. 고개마다 수많은 사람의 발자국과 함께 삶과 정, 문화가 깃들어 있다.
과거길에 고개를 넘어가며 청운의 꿈을 품었고, 일제 강점기 징병으로 끌려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어머니가 눈물 짓던 곳도 고갯마루였다. 고개에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문경새재나 죽령 등 익히 알려진 고개들이 관광상품으로 각광받는 것을 계기로 경북 23개 시·군마다 고개를 관광명소로 만들려는 '고개 마케팅'을 활발히 펴고 있다.
조선시대 청도에서 대구로 가기 위해서는 각각의 고개를 넘는 두 길이 있었다. 이 중 하나가 팔조령을 넘는 길이었다. 팔조령은 고개가 너무 높고 험해서 도둑들이 들끓어 같이 넘어갈 사람이 적어도 8명은 있어야 했다는 이유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문열의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나와 유명해진 곳이 영덕군과 영양군을 잇는 창수령이다. 영양이 고향인 이문열은 "해발 700m인 창수령을 넘는 세 시간 동안 세계 어디에서도 못 느낀 감동을 느꼈다"고 극찬한 바 있다.
문경시 문경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문경새재는 과거길이라는 역사성과 자연을 간직한 길이라는 덕분에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국민관광지'로 떠올랐다. 문경시는 문경새재 입구에 길을 주제로 한 옛길박물관을 만들고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해 '고갯길 마케팅'에 적극적이다. 문경시는 문경새재라는 브랜드를 활용해 찻사발축제와 사과축제, 각종 걷기대회, 달빛사랑여행 등 다양한 축제와 이벤트를 개최해 관광객 유치 효과를 톡톡히 거두고 있다.
중앙고속도로 개통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던 소백산 죽령도 영주시의 죽령옛길 복원사업에다 선현들의 발자취를 밟아보려는 방문객들의 호기심으로 옛 영화를 되찾고 있다.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서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넘어가는 아흔아홉 굽이의 험준한 고갯길인 죽령은 영남에서 충청이나 경기도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하지만 2001년 12월 국내 최장 길이를 자랑하는 죽령터널(4.5㎞)이 뚫리면서 한적한 길이 됐다. 그랬던 죽령이 제주도 올레길처럼 다시 부활의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하지만 경북의 옛길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예전 팔조령 고갯길은 넓은 돌을 깔고 틈새를 흙으로 메운 보기 드문 포장길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흔적은커녕 옛길조차 찾기가 힘들다. 창수령도 15년 전 고갯길이 아스팔트로 포장되면서 오솔길 대부분이 사라진 탓에 옛 정취를 이제는 찾아보기 어렵다.
◆걸을 길이 적다
국내에는 국립공원과 주요 명산을 중심으로 등산로는 많다. 하지만 걷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와 요구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이미 30~40년 전부터 탐방로 조성사업을 해왔다. 일본의 장거리자연보도는 일본 전역을 종단·횡단·순환하는 길로, 자연과 역사 등을 배우며 체험할 수 있다. 1970년부터 조성돼 일본 전역에 모두 8개 권역의 자연보도를 만들었다. 장거리자연보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자원이 발굴되거나 이용자의 편의 등에 의해 지자체의 요청이 있을 경우 기존의 길이 자연보도로 정비되거나 새롭게 선정된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영국의 내셔널트레일 등은 대표적인 탐방로이다.
이처럼 선진국에서는 각 지역에서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걷는 길이 그물망처럼 이어져 있다. 이는 정부나 지자체가 국민들의 여가를 위해 발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올레가 2007년 조성되기 시작해 전국적인 걷기 열풍을 일으켰다. '올레'는 원래 집 앞의 좁은 골목길을 일컫는 말이었다. 3년 동안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놀멍 쉬멍 걸으멍' 17코스 357㎞의 올레길을 만들었다.
환경부는 생태탐방로조성 사업을 국정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2017년까지 전 국토에 걸쳐 강길과 옛길을 연결해 생태탐방로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 계획은 지자체를 주된 동반자로 삼아서 추진하기로 했다.
◆옛길을 살리자
제주도 올레길이 뜬 뒤 전국적으로 길닦이 열풍이 불었다. 경상북도도 마찬가지다. 경북도는 2017년까지 영남옛길 복원사업을 포함한 생태·문화탐방로 조성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경북도는 산, 강, 바다로 이어지는 풍부한 생태자원과 신라·가야의 고대 역사문화, 유교·불교로 대표되는 정신문화 등을 이용해 걷기 좋은 경북을 만들 계획이다. 제대로 된 옛길의 복원은 지역 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전망이다.
5천년 역사 속에서 민초들은 거의 발품에 의지해 길을 다녔다. 그 길이 불과 100년 사이에 사라졌다. 이제 그나마 남아있는 옛길을 찾아야 할 때다. 그것이 진정한 문화의 복원과 역사에 대한 친근한 접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북의 옛길이 길로 다듬어지기 위해서는 과제도 많다. 경북지역에서 실제로 옛길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옛길 자리는 인도조차 없이 국도나 지방도가 차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영남대로와 죽령, 추풍령뿐만 아니라 동네 장터에서 주막집을 지나 역까지 가는 길에도 이제는 이름표나 작은 기념비석을 세워야 한다. 이곳에는 지역의 역사와 민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기 때문이다.
살아 숨쉬었던 민중의 삶, 일하며 밥 먹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놀았던 희로애락의 생생한 혈관이자 중추가 바로 옛길이다. 경북의 옛길을 되살리는 것은 지역문화를 풍성하게 하고, 지역주민의 삶에 정체성을 불어넣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옛길기행'은 경북의 옛길을 다시 찾고 온전한 길로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새해부터 1년간 길을 떠난다.
모현철기자 mom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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