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악어의 눈물을 위하여/안준우

입력 2010-12-31 07:38:07

단편소설 당선자 안준우 씨
단편소설 당선자 안준우 씨
심사위원 김원일(소설가)
심사위원 김원일(소설가)
심사위원 김형경(소설가)
심사위원 김형경(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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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커다일(crocodile). 바다악어로도 불리며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 지역에 서식한다. 주로 적도 부근 열대 지방의 강 하류에 서식하며 나일악어가 대표적이다. 나일악어는 악어 중에서 가장 크며, 크게는 10미터까지 자란다. 미국 동부와 중국 등지에 서식하는 앨리게이터(Alligator)보다 공격적이며, 드라큘라처럼 나 있는 덧니로 앨리게이터와 구별된다. 주로 소금기가 많은 먹이를 섭취해서 몸속에 쌓인 염분은 눈물샘을 통해 배출하는데, 이것이 악어의 눈물로 잘 알려져 있다.

김 형사는 악어 우리 입구에 세워진 안내문을 쳐다봤다. 우리 안의 악어 중 가장 큰 놈은 족히 6미터는 넘어 보였다. 안내문처럼 밖으로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에는 아직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사육사에 의하면 나일악어는 악어과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종중의 하나이며, 작은 코끼리도 공격해서 잡아먹는다. 물속에서 코끝과 눈, 귀만 드러낸 채 물을 마시러 오는 동물들을 사냥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사육사는 힘주어 말했다. 그럼 저건 뭐지? 김 형사가 폴리스 라인 너머에 축 늘어져 있는 악어들을 가리키자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여섯 마리의 악어는 사육사가 쏜 마취 총에 맞고 모두 늘어져 있었다. 단단한 회색 가죽의 두터운 꼬리는 물속에 반쯤 잠겨 있었고, 악어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인공 늪지의 물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육지 위로는 희생자의 사체로 보이는 살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침 먹이를 주러 우리로 들어간 사육사가 실성한 사람처럼 살인 사건을 신고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김 형사는 오랜만의 긴장감이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한동안 관내에서 살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물원 악어 우리에 시체가 있다는 간단한 신고 내용만 듣고, 범인이 시체를 유기할 목적으로 한밤에 동물원으로 들어와 악어 우리에 던지고 간 것이라 판단했다. 그는 현장에 도착한 후 신속하게 상황을 통제했다. 마취 총으로 악어들을 잠재우고, 폴리스라인을 친 후, 경찰특공대 저격수와 현장감식반을 지원 요청했다. 현장 보존이 끝나자, 김 형사는 사육사의 안내를 받아 동물원 통제실로 향했다. 동물원에는 각 우리마다 동물들을 감시하기 위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김 형사는 이미 악어 우리의 카메라 위치도 파악했다. 카메라가 멀쩡한 것으로 보아, 사체를 유기한 범인은 이를 간과한 것이 분명했다. 동물원 측은 감시 카메라가 매일 24시간 작동되고 있다고 자랑했다. 담당자는 새 녹화 테이프를 갈아 끼우고는, 당일 녹화 테이프를 증거물로 건넸다. 사건이 의외로 쉽게 풀릴 것 같아,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져 들었지만, 통제실로 허겁지겁 달려온 동물원 책임자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돌아서는 김 형사를 붙잡고, 몇 번이나 언론 통제를 요청했다. 김 형사가 현장으로 돌아온 후, 곧 반장이 저격수와 현장감식반을 데리고 나타났다. 김 형사가 대충 상황을 설명하자, 반장은 저격수에게 악어들을 사살하도록 했다. 저격수는 침착하게 슈타이어 라이플로 악어 머리를 조준하여 차례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한 차례씩의 확인 사살 후, 현장감식반이 폴리스라인 안으로 들어갔다. 김 형사는 현장을 반장에게 맡기고 동물원 관계자들을 탐문 수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이미 동물원 측은 정문 쪽에 긴급 내부공사로 휴장이란 안내판을 내걸고, 정문을 봉쇄했다.

2

"아니 그 미친년은 왜 동물원에 가서 뒈지고 지랄이야 지랄이. 남들처럼 목을 매든지, 한강에서 뛰어 내려도 되잖아."

반장이 신경질적으로 사건 보고서를 던졌다. 동료들도 반장 말을 거들며, 볼멘소리를 한마디씩 했다. 김 형사는 수사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보고서에는 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사인은 검시 보고서에 따라, 악어의 공격으로 인한 과다 출혈 심장 쇼크사였다. 증거품으로는 감시카메라의 녹화 테이프,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숄더백 한 점, 운동화 한 족이었다. 숄더백 안에는 지갑 한 점과, 잡다한 화장품 몇 점, 빈 주사기 한 점과 노트 한 권이 전부였다. 빈 주사기를 제외하면 특별할 것이 없는 증거품들이었다. 지갑에는 28,000원의 지폐와 신용카드 한 점,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신원 조회로 애먹을 필요도 없는, 매우 편리한 증거품들이었고, 보고서엔 이미 인적 사항이 상세하게 조회되어 있었다. 녹화 테이프는 이 사건이 불분명 자살로 판명되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사인은 악어의 공격 때문이지만, 녹화 테이프에는 분명히 홀로 우리를 넘어 악어에게 다가가는 피해자가 찍혀있었다. 시간은 밤 11시 40분경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악어 우리로 향하는 이동 경로에 설치된 다른 감시 카메라에도 피해자는 처음부터 홀로 포착되었다. 시간도 일치했다. 분명한 자살이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J란 여자는 한밤에 홀로 동물원에 침입해 망설임도 없이 악어 우리를 넘어 스스로 악어에게 잡아먹혀 자살한 것이다.

누군가 가족에게 통보부터 하자고 했으나, 반장이 매섭게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DNA 검사하고 지문 감식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려. 현장에 있는 신분증 하나 달랑 믿고, 당신네 딸이 죽었어요, 그랬다가 나중에 멀쩡히 살아있으면 니가 책임질 거야! 감식 결과가 신분증하고 일치하면 그때부터 움직여. 그리고 김 형사는 저 노트 뒤져봐. 자살이면 어디 유서라도 있을 거 아냐, 찾아. 유서가 나와야 깔끔하게 자살로 마무리되지."

김 형사는 유서가 없을 수도 있다고 한마디 하려다 말을 삼켜버렸다. 20년 넘게 강력반에 몸담아온 반장은 다혈질이며, 직감적이었다. 그가 화를 내는 사건은 해결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이번 사건은 시작부터가 감이 좋지 않다. 유서는 아마 없을 것이다. 사실, 자살자들이 유서를 남기는 경우는 통계상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김 형사는 경험상 몸의 형체를 상하게 하면서 스스로 숨을 끊는 자살자들이 유서를 남기지 않을 확률은 더 높다고 믿었다. 목을 매거나, 약을 먹고 자살하는 경우는 그래도 유서를 남긴 경우는 많았지만, 분신을 하거나 투신을 하여 신체를 파괴하며 자살하는 경우는 유서를 남기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았다. 자살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며, 유서는 그에 대한 해명이다. 유서를 남기지 않는 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처참한 육신을 남김으로써 유서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남긴다. 김 형사는 몇 년 전에, 바람난 남편이 애인과 함께 투숙한 모텔 앞에서 분신자살한 한 여인을 떠올렸다.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그녀가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였을 것이다. 까맣게 타 버린 그녀의 시신 앞에서 남편은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김 형사는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했다. 그때 그는 그 장면을 두고 스스로 전략적 자살이라고 규정했었다. J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전략적인 자살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전략인지는 몰라도, J는 제대로 된 방법을 택한 것만은 분명했다. 김 형사는 증거품 5호라고 적힌 비닐봉투를 집어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갈색 가죽 커버의 두터운 노트는 한눈에 봐도 오래 사용한 흔적이 묻어 있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책상 위로 고여 있었고, 김 형사는 천천히 첫 장을 넘겼다. 이미 확인한 인적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지만, 소속에는 '인지행동연구소'라 적혀 있었다. 정자로 또박또박 눌러 쓴 보기 좋은 필체였다. 그는 수사 수첩을 꺼내어 J의 소속을 옮겨 적은 뒤, 다음 장부터 건성건성 훑어보니, 일기였다. 유언이나 자살의 단서를 찾을 가능성은 높았지만, 처음부터 꼼꼼히 다 읽어야 할 것 같아 김 형사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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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 감식과 DNA 검사 결과는 J와 일치했다. 김 형사는 그녀의 죽음을 알릴 부모나 가족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업(業)을 하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를 덜었다는 건 행운이었다. 일단 직장에는 알려야 했다.

"뭣이라, 인지행동연구소? 거, 참 별 연구소가 다 있네. 그나저나 직장도 좋아 보이는데 실연했다고 세상하고 세이 굿 바이 하면 되나. 쯧쯧쯧."

반장이 김 형사의 보고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는 알아서 하라고 손짓했다. 김 형사는 인터넷에서 찾은 인지행동연구소에 대해 잠시 설명하려다 그만뒀다. 사체의 신원이 밝혀졌고 정황상 자살이 분명한 사건이므로, 반장은 이미 종결 건으로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김 형사는 실연 때문에 자살했다고는 보고하지 않았지만, 반장은 이미 그가 보고한 일기의 앞부분만을 듣고 그렇게 단정지어 버렸다. 사실 가능성 높은 추론이기는 하다.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해결해야 할 건이 산더미였다. 경기가 하강하면서 절도나 강도 사건도 지난 정부에 비해 훨씬 늘었지만 강력계 인원은 오히려 줄었다. 반장은 김 형사에게 악어살인사건을 빨리 종결짓고 다른 수사에 합류하라고 종용했다.

인지행동연구소는 S대학 내의 중앙 연구동에 위치했고, 김 형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책임 연구원이란 명함을 내밀었고, 김 형사는 J의 죽음을 세세하게 알렸다. 한밤중의 동물원에서 악어에게 습격을 당해 죽었다는 말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김 형사는 자살 같다는 말을 슬며시 덧붙여 보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최근에 신규 연구를 승인받는 데 애는 먹었지만, 결국 승인을 얻어 어느 때보다 의욕적인 그녀가 자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안내로 함께 일한 동료들을 간단하게 면담을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J가 일했던 연구실은 창 너머로 학교 광장의 분수대가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솟구치는 물줄기가 오후의 햇살을 사방으로 튕겨내고 있었다. J와 함께 연구실을 사용한다던 단발머리의 동료는 한참을 울다, 예정된 실험 일정이 있다며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김 형사는 J의 책상에 앉아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잘 정리된 책상이었다. 책꽂이에는 영문으로 된 전공서적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탁상 달력에는 스케줄이 꼼꼼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이틀 후의 날짜에는 붉은색으로 학회 참석이라고 적혀 있었다. 3단 서랍을 모두 열어 보았지만, 너무 잘 정돈되어 있는 문구류 빼고는 특이한 것이 없었다. 김 형사는 마지막으로 책상 위의 작은 액자에 담긴 사진을 보았다. 날카로운 턱 선과 얇은 금속 안경테를 쓰고 있는 사진 속의 사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김 형사는 사진을 챙겨 나서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그녀의 동료를 불러 세웠다.

"J의 애인이었는데, 지금은 아마 한국에 없을 거예요. 와이프와 사별하고 J와 잠시 만났었죠. 아마 캘리포니아 어느 연구소에 교환 연구원으로 간다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J가 좀 속상해하긴 했지만, 뭐 심한 정도는 아니었어요."

앞뒤가 맞지 않았다. 김 형사가 마주친 J의 첫 일기와는 일치가 되지 않는 증언이었다. 그는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와 다시 증거 제5호, J의 일기를 펼쳤다.

일기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길고도 지루하게 씌어졌다. 깨알같이 잔잔한 글씨가 얇은 재질의 종이를 끈질기게 넘고 넘어 무던히도 날짜를 이어갔다. 중간에 짧은 다른 업무를 하면서도 손을 놓지 않고 훑어보던 일기는 저녁시간이 훨씬 지나서도 진도가 얼마 나가지 않았다. 일기에는 유서의 흔적은커녕, 새로운 연구에 대한 집념, 목표에 대한 분명한 열정 등 삶의 치열함만 가득했다. 촘촘하게 짜여진 빈틈없는 감정의 격자에 도대체 사소한 연애감정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이다가도 그의 이야기에선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녀는 일에 대한 목표를 한 줄 실오라기처럼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 했다. 그와 새로운 연구는 마치 그녀를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그 경계를 지나가고 있었다.

김 형사는 빠른 속도로 일기를 읽어 내려갔다. 정독보다는 속독으로 죽음과 관련된 부분을 찾으려 눈동자를 무던히도 빠르게 굴렸지만, 일기는 대부분 연구와 관련된 부분으로 이어져 내려갔다.

김 형사는 노트를 덮었다. 끈질기게 읽어내려 갔지만 반장이 원하는 유서는 없었다. 그녀는 일기장에 새로운 연구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를 관통하는 절망을 이기기 위한 것 같았다. 그로부터 버려짐으로써 상처받은 자존심을 지키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자아를 지키려는 몸부림 같았다. 모든 것이 모호했다. 실연에 대한 절망의 깊이가 뚜렷하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도 강렬했다. 특히 연구에 관한 열정은 치밀하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J는 그를 지독하게 사랑했다는 것이고, 아내와 오래전에 사별한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J도 일기장 중간 중간에 여전히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그에 대한 원망을 숨기지 않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생길 만한 내용일지는 몰라도, 사건 종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들이었다. 그나마 오늘 끈질기게 읽은 내용 중 한 가지 수사해볼 만한 단서를 찾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4

실연클럽은 회원 수가 삼만 명을 넘는 인터넷 카페였다. 정회원이 되어야 모든 사연을 볼 수 있었다. 김 형사는 실명으로 회원 가입을 하면서도 별짓을 다한다고 투덜거렸으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승인을 위해 기입해야 하는 구체적 설문 내용에서 김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취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회원 가입을 해서 J의 흔적을 더 추적하고 싶었지만, 절차가 번거로웠다. 사건 해결에 필요한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지만, 이미 단서는 찾은 셈이다. 대신 해당 카페를 개설해 준 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에 협조 공문을 보냈다. 이 편이 훨씬 빨랐다. 그리고 김 형사는 J의 주거래은행에 금융거래정보 제공 협조 공문도 함께 보냈다. 그는 타이핑을 하면서 가슴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쾌감을 느꼈다. 한 여자의 답답한 일기장을 뒤지며 단서를 찾는 일에서 마침내 현실적인 곳에서 사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 것이다. 김 형사는 돈에 초점을 맞췄다. 돈은 자살이건 타살이건 많은 사건의 동기였고, 출발점이었다.

금융거래 내역이 은행으로부터 팩스로 전송되었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내역이었다. 혼자 사는 여자의 단출한 살림살이가 기록되어 있었다. 각종 공과금과 카드 대금이 빠져 나가고 급여가 이체되어 왔으며, 소액 몇 건의 보험과 적금, 펀드 금액이 정기적으로 빠져 나갔다. 꼼꼼히 내역을 살피던 김 형사는 마침내 수상한 내역을 발견했다. 실연클럽 가입 이전에는 통장에 등장하지 않던 수취인 앞으로 몇 건의 송금 내역이 있었는데, 금액이 다양했다. 특히 가장 최근에는 정기적금을 해약한 목돈이 그 이름 앞으로 고스란히 송금되었다. 김 형사는 곧 은행에 그 이름의 신원조회를 요청했다. 어디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증거를 위해 헤매던 답답한 활자의 밀림에서 빠져나와 광명을 찾은 기분이었다. 느슨해져 있던 근육을 다시 팽팽하게 당기는 긴장감이 찾아왔다. 적어도 통장에 찍혀있는 반복된 이름의 사람은 현실이자, 증거이며, 사건 해결의 실마리나 용의자 혹은 목격자 등의 결정적인 인물이 될 수가 있다. 일기장은 심문할 수 없어도 사람은 심문할 수 있다. 김 형사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감돌았다.

5

처녀보살의 신원이 조회되었다. 사기 전과 5범으로 주로 무속인이나 종교인 행세를 하며 사기를 쳤다. 김 형사는 즉각 반장에게 보고를 했다. 반장은 사건을 김 형사에게 배정한 후 거의 잊어버렸다가, 그의 뜻밖의 보고에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자살이라고 스스로 판정 내려 버린 사건에 사기 전과범이 연루되었다는 보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연결고리가 없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자살 사건이며, 우연히 사기 전과범과 연루되었을 수는 있지만, 악어로 자살한 J와 그 전과범을 연결시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네는 그 여자가 악어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자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현장 증거만 보면 100퍼센트 자살이 확실하지만, 그 전에 이건 사기 사건이 먼저입니다. 그 여자 전 재산이 처녀보살에게 털렸어요."

김 형사는 J의 금융거래 내역서를 반장에게 내밀었다.

"많이 배운 년이 뭔 이런… 그러니까 사기당한 게 분해서 악어한테 가서 그냥 뒈진겨?"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니 높습니다. 일종의 전략적 자살일 수도 있죠"

"자네 그 전략적 자살 대개 좋아하는구만. 나 같으면 죽기 전에 사기죄로 고발부터 하겠네. 할 수 없지. 일단 조사할 수 있는 건 다 조사하고, 필요하면 처녀보살 수색영장 발부받아서 싹 뒤져봐. 뭐 비슷한 거 하나라도 엮이면 일단 집어 처넣고 수사해 보자구."

김 형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자네 그 증거 일기장은 다 읽어봤나? 유서는 나왔어?"

"지금 읽고 있는 중인데 아직 없네요."

김 형사는 처녀보살의 금융거래 내역 조회를 금융기관에 신청했다. J는 분명 그녀의 사기 피해자였고, J와 비슷한 피해자가 더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정황상 처녀보살은 실연클럽의 인터넷 공간에서 활동하며 J에게 사기 친 수법으로 실연을 당한 불특정 다수에게 금전을 갈취해왔을 것이다. 실연클럽이란 곳에 그녀를 도와준 조직적인 여리꾼들이 활동했을 것이다. 김 형사는 일단 수사의 범위를 처녀보살의 사기행각에 맞추었다. J는 그 피해자 중의 한 명이며, 가장 불쌍하고 극단적인 피해자일 것이다. 하긴, 남들보다 훨씬 많이 배운 엘리트가 어처구니없는 사기에 당했다는 걸 알고 난 후의 그 좌절감과 상실감은 얼마나 비참했을 것인가. 쉬이 상상이 갔지만, 극단적인 자살 방법은 도무지 상상도, 이해도 가지 않았다.

처녀보살의 모든 금융거래 내역이 조회되었다. J 말고도 수많은 송금 내역이 있었고, 큰 금액의 송금 건도 상당수 있었다. 김 형사는 반장에게 보고하고 처녀보살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압수 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반장은 인원을 몇 명 더 보강해서 출동하라고 했으나, 김 형사는 전경 두 명만 데리고 경찰서를 나섰다. 패트롤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변 도로를 달렸다. 그는 이제 뒷면이 꽤 얇아진 일기를 계속 읽어 나갔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차창을 그대로 관통해 눈이 아렸다.

도착 10분 전이라고 운전을 하던 전경이 알려왔다. 김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일기를 읽는 동안 차가 처녀보살의 집 앞에 멈추었다. 건물 외벽이 고급 대리석으로 마감된 낮은 빌라였다. 김 형사는 전경들에게 담배 한 대를 피우게 하고는 일기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끝)

◇소설 심사평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본질적으로 소외된 존재인 현대인의 속성을 그린 작품이 어제오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읽어나가며 느낀 감회는 현대인이 정말 외롭구나 하는 거였다. 작품 속 인물들은 대부분 철저히 소외된 상태로 존재하는데, 아예 죽임을 당해 야산에 누워 있거나,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생사 여탈권을 쥔 바깥 세상을 보며 불안해한다. 그들은 타인을 고통의 대상으로만 경험하며, 외부에서 온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해 더 강한 고통을 스스로에게 선사한다. 최종 논의된 작품은 '가면의 꿈'과 '그녀는 왜' 두 편이었는데 두 작품은 서투르게나마 외부와 소통을 시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 노력이 작품의 완성도와도 상호 관계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가면의 꿈'은 결혼 정보업체에 근무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오늘의 결혼 풍속을 그려 보이는 작품이다. 미화된 가면을 쓰고 행복이라는 환상을 좇는 인물들이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는 일상적 사건들이 아기자기하게 제시된다. 문장이 안정되어 있고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으나 예측 가능한 서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악어의 눈물을 위하여'는 인지행동 연구소 연구원인 한 여성의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거절하는 대상에게 매달리기, 떠난 사람을 되돌리기 위해 마술적 행위에 의존하기 등은 관계 맺을 줄 모르는 인물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과학적인 수치만 믿으려는 속성과 비과학적인 방법에 의지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불안감이라는 공통된 뿌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통찰해 보이는 점도 흥미롭다. 추리 기법으로 구성되어 있어 독자를 끌고 가는 힘이 있고, 피해자의 일기와 수사 진행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점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악어의 눈물을 위하여'를 당선작으로 선정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숙련도 때문이기도 하다.

심사위원 김원일(소설가)·김형경(소설가)

◇당선 소감

작가의 유전자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것이 있다면 내 몸에 이식하는 방법을 알아보겠다.

오랫동안 이유 없이 쓰던 시절이 있었고, 한동안은 아무것도 쓸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앞의 시절엔 치열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쓰지 못하던 때는 두려웠고 많이 움츠러져 있었다. 이때는 외로워지고 그리워지는 일들이 밥을 먹고 똥을 싸는 것처럼 매일 반복되었다. 홀로 심야의 극장을 서성였고 음악을 들었고, 간간이 책만 겨우 읽었다. 쓴다는 것, 그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써야 하는 절대명제가 없음이 두려웠고, 외로워지는 일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에 나는 침묵도 했다. 침묵은 확실히 편했다.

편했지만, 그건 곧 견디는 일이었다. 편한 것이 견디는 일이라니! 쓰지 않음을 견디는 일이란 쓴다는 두려움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소설을 쓴다는 일은 여전히 두려움과 마주하는 일이지만 이제 물러서지 않겠다. 멈춤 없이 오랫동안 쓰는 작가가 되겠다.

당선 전화를 받고 덜컥 겁이 났습니다. 부족한 작품에 기꺼이 큰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매일신문사에 감사드리며, 더 열심히 쓰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제 글쓰기의 유일한 스승이자 동료이자 친구인 소창동 문우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일오회 친구들, 동네 친구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소중한 가족들, 늘 삼류라며 오기를 발동시켜준 아내와 우리 콩 은채와 이 기쁨을 나누겠습니다. 장래 희망이 작가인 장빛다은과 효준이도 파이팅!

◆ 약력

안준우

1972년 포항출생

포항 소창동(소설창작동우회) 회원

무역업 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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