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낙동강 시대] <24> 안동 가송리마을(2)

입력 2010-12-29 07:45:25

버스길 직접 닦고, 출렁다리 건설도 함께…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사람들

소나무가 아름다운 안동 도산면 가송리는 주민들의 심성도 아름답다.

성성재가 청량산과 낙동강이 빚어낸 절벽 옆에 정자(고산정)를 짓고, 스승인 퇴계는 자주 들러 '유고산(遊孤山)' 등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농암종택도 달빛 쏟아지는 연못(월명담)을 휘돌아간 가송리 산기슭으로 옮겨왔다.

주민들은 아름다운 풍광에 아름다운 힘을 더했다. 650년 전 피난 왔던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위해 지금까지 제를 올리고, 품앗이와 계로 마을의 결속을 다진다. 당제와 당산나무, 산신각, 몽득당 등 고유의 민속신앙과 믿음도 공고하다. 70년대 버스길을 직접 닦았고, 80년대 강을 가로지르는 출렁다리 건설에 함께 팔을 걷어붙였다. 아름다운 마을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섬, 길이 뚫리다

1985년 6월 20일. 가송리(가사리, 소두들, 올미재) 주민들에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강물이 갈라놓은 가사리와 소두들을 다리로 이은 날이기 때문이다. 낙동강 '출렁다리(새마을구름다리)'. 강 건너 동쪽 가사리는 배를 타지 않으면 안동이나 봉화로 나갈 수 없었기에 섬마을로 여겨졌다.

권순희(66) 씨는 "여름엔 배, 겨울에는 나무다리를 놓는다고. 추운데 벌벌 떨면서 물속에 들어가 섶다리를 놓았는데 우리는 찬도 해주고, 점심해주고 그랬지"라며 "봄에 얼음이 녹아 물이 불면 (섶다리는) 떠내려가 버렸지. 여기는 다리 없는 섬나라였어"라고 말했다.

나룻배와 섶다리의 불편함은 콘크리트 다리 건설에 주민들이 직접 나서게 했다. 당시 마을회관을 짓기 위해 마련한 공동 자금이 다리 건설의 종자돈이 됐다. 회관보다 다리가 더 급선무였던 것.

설계도도, 전문 기술자도 없었다. 주민들은 머리를 맞대고, 힘을 나눴다. 다른 지역에 설치된 다리를 찾아다녔다. 태백과 문경 광산촌에서 폐 철근을 얻어오기도 했다. 다리 답사, 공법 연구, 철판 제작 등 주민들은 역할을 분담했다. 1984년 10월 30일 드디어 공사를 시작했다.

김은하(63) 씨는 철공소에서 철판을 원형으로 드럼통처럼 만들어 콘크리트를 부어 응고시키는 방법으로 구조물을 만든 뒤 이를 철근과 나무판으로 연결해 다리를 세웠다고 했다.

"매일 밤 모여서 서로 의논해서 했어. 목수도 있었지만 전문기술이 없어, 다들 이야기하면서 '이래하면 될 것이다' 의논해가지고. 드럼통, 쇠를 이래 해 가지고 뚜껑을 만들고, 한 동가리씩 시멘을 채워 올리고, 다시 위에 채워 넣고. 하루에 한 동가리씩 그래 해 가지고 다리를 세운 거야."

안용하(68) 씨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지대를 만들고, 다리 양쪽을 광산에서 얻어온 폐 와이어로 연결한 뒤 바닥에 나무판을 연결한 다리는 사람이 건널 때마다 출렁인다고 '출렁다리'라고 했지"라고 했다.

출렁다리는 10여년을 버텼다. 애초 정확한 공법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기에 90년대 중반 어느 날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이후 새 다리가 놓였지만, 지금도 교각 등 옛 출렁다리의 흔적은 강 속에 남아있다. 가송리 공동체의 끈끈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비, 내리소서

청량산 기슭 가사리의 논은 양수기 등 농장비가 도입되기 전까지 모두 천수답이었다. 비는 목마른 대지에 공통의 젖줄이었다. 70년대 이전까지 비가 절실했다. 따라서 기우제는 동제와 함께 마을의 주요 의례였다.

가사리 기우제는 청량산 일출봉(육칠봉)과 낙동강 월명담(소)에서 이뤄졌다. 마을 부녀자들이 일제히 산을 올랐고, 닭 피와 돼지머리와 술이 뒤따랐다.

금용객(60) 씨는 "그땐 죄 가물었거든. 육칠봉 꼭대기 마당바위라고. 돌이 평평하니 독특해. 가물어서 농사가 안 되고 그러니까, 달거리 있는 사람이 닭 피를 바위 위에 묻히고 오면 비가 와서 씻겨나가도록 내린대. 그래 비가 왔어. 신기해. 그래 가지고 고기 먹고, 술 먹고, 노래하고 그랬어"라고 말했다.

권순희 씨도 "꼭대기에 불도 놓고 그랬다고. 닭 피를 온데 지저분하게 묻혀 놓으면 비가 씻는다고 했지. 옛날 전설이 있었어"라고 했다.

일출봉 기우제가 제대로 효과가 없으면 마을 앞 강물 가장 깊은 곳인 월명담에서 제를 지냈다.

김은하 씨는 월명담 기우제에 대해 설명했다.

"일출봉에서 제대로 안 들으면 월명담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고. 용 모양으로 용떡을 만들어 가지고, 돼지머리를 매 가지고 배에다 북을 둥둥 울리면서 절하고, 축도 고하고 하지. 제사를 다 지내고 돼지머리하고 용떡을 물에 띄운다고. 그리고 기우제 지내면서 비가 많이 오라고 물가에다 움막 비슷하게 지어놔요. 그게 떠내려간다고."

가사리의 기우제는 산신과 용왕 등 두 루트를 통해 이뤄졌다. 산에 연기를 피우고 닭 피를 뿌리며 하늘의 분노를 자극해 비를 내리게 하고, 이마저 통하지 않으면 물을 관장하는 용왕에게 제를 지낸 것이다.

◆추억, 아스라이 쌓이다

가송리 사람들은 버스가 처음 들어오고, 은어가 떼 지어 물살을 가르던 때를 잊지 못한다.

소두들에 버스가 들어오는 데는 꼬박 5년이 걸렸다. 이전까지 버스를 타려면 면 소재지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버스 도로를 닦는 예산은 마을 공동 소유의 전답과 공동기금을 활용했다.

권기원(63) 씨는 "옛날에 쌀 귀하고 그럴 때 마을에는 (공동 소유의) 논 300평, 밭 300평 있었는데. 요즘 누가 (경작)할라하질 않아서, 한 20년 묵었을 거라"라고 했다.

당시 이장을 맡았던 손연모(74) 씨는 버스길과 다리 건립과정을 회고했다.

"마을회관 짓는다고 150만원을 모았는데, 안 지었어요. 그래 그 돈을 가지고 사채를 돌렸어요. 연말 되면 이자 쳐서 받고, 그 돈이 600만원 정도 됐어. 그 돈으로 버스를 개통시켜서 윗마을(소두들) 교통난을 해결했고, 뒤에 건넛마을(가사리)이 강 때문에 버스를 못 타니까 (출렁)다리를 놓자 이렇게 됐어."

1972년 마을 사람들은 나무를 베 판자를 만들고, 직접 시멘트를 등짐으로 나르며 도로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손 씨는 (버스)도로 준공식 날 '눈물이 났다'고 술회했다.

"여기까지 버스를 연장하려고 72년부터 76년까지 우리가 도로를 닦았어. 옛날에는 기계가 없어서 등짐으로 했지. 매년 시멘트 500~700포대 청구하고, 등짐 지고 리어카 몇 대로 나르고, 모래를 돌에다 풀어가지고 하고. 나무를 베다가 송판을 제재소 가서 맞추고 했지. 3월 18일 날 버스(도로) 준공식을 했어요. 오거리 생가 앞에 솔문을 했어요. 솔로 쌓아서 만들었지. 테이프 끊고, 동네 분들이 뒤에서 버스 타고 왔어요. 그때는 정말 눈물이 나더라니까요."

76년 소두들에 버스가 들어왔고, 2년 뒤 전기도 들어왔다. 출렁다리가 생긴 85년부터는 강 건너 가사리까지 버스의 혜택을 보게 됐다.

가송리는 버스 못지않게 은어도 정겨운 추억의 대상이다.

모래사장에는 여름이면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 은어가 유명해 강원도에서도 낚시꾼들이 왔다.

손연모 씨는 "물살 내려간 데마다 서 가지고 잡았어. 하루 잡으면 70~80마리씩 잡았어. 은어가 가을 되면 부화하는데, 요놈이 새끼가 내려간 데로 내려갔다가 올라오는데. 댐 만들고 난 뒤부터 자취를 감췄어. 그것도 영향이 있고, 농가에서 농약을 많이 쳤거든"이라고 했다.

안동댐이 들어선 뒤 물길이 막히고 농약 사용으로 강이 오염되면서 은어는 급격히 줄었다. 손 씨는 월명담에 민물자라도 많았다고 했다. 물가 모래사장으로 나와 알을 낳았는데, 보통 한 군데에 10개에서 30개가량 됐다고 한다.

전기와 버스가 들어온 지 30여년. 요즘 가송리는 펜션과 래프팅이 인기를 끌고 있다. 래프팅 업소가 들어오면서 여름철은 은어가 헤엄치던 예전보다 더 북적인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공동기획:매일신문·(사)인문사회연구소

◇마을조사팀

▷작가 안태호·김수정 ▷사진 박민우 ▷지도일러스트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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