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반복, 가볍거나 무거운

입력 2010-12-25 07:17:26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큰 틀이 있다.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세계는 그리 변하지 않는다거나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리주의적인 사고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반면, 진보주의는 생물의 진화를 반영하듯 변화와 발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틀에 끼인 또 다른 이해 방식으로 순환주의를 꼽을 수 있다. 세상은 돌고 돈다는 순환주의적인 이해는 자연의 순환에서 비롯된 듯이 보이는바, 여러 종교나 문학과 예술에서 매혹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체코 출신의 저명한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순환주의에 대해 흥미롭게 천착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반복되는 건 무겁고, 반복되지 않는 것은 가볍다고 한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아무리 끔찍해도 반복되지 않는 한 조금도 두렵지 않을뿐더러 깃털처럼 가볍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무시무시한 살인자가 역사상 단 한 번만 등장한다면 그자는 무섭기는커녕 향수마저 불러일으키지만 그가 계속 되살아난다면 이보다 더 공포에 질리는 노릇은 없다는 소리다.

어느덧 연말이다. 각종 언론에서 올 한 해를 돌아보는 특집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 개인들도 온갖 송년회에 불려다닌다고 정신이 없다. 나 역시 이 지면을 통해서 '뉴스 갈라보기'를 써온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좌파와 우파의 해묵은 공방, 북한이 우리나라에 던지는 위협의 메뉴, 정치인들의 거짓말, 정치 검찰에 대한 시비, 프로야구, 연예계의 잡음 등 꽤 다사다난한 1년이었지만 사실은 한 해 전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사건의 반복인 것 같다.

연말에 일어난 일도 전혀 새롭지 않다. 서쪽 최전방에 있는 애기봉에서 성탄 점등을 했다는 소식, 누가 방송사 연예대상을 받을 거라는 소식, 심지어 교수들이 '금년의 사자성어'로 택한 장두노미(藏頭露尾)라는 말도 거의 들어보지 못한 괴상한 단어구나 싶으면서도 왠지 수긍이 가는데, 이 또한 예년의 반복이다.

이쯤 되니까 반복이란, 밀란 쿤데라의 주장과는 다르게 무겁지가 않고 가벼운 성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떤 계획을 세워놓고 삼 일만 지나면 없던 것이 된다. 금연이나 단주를 실패할 때마다 그 실패의 반복은 그지없이 가볍다. 실패감은 면역이 되어서, 마치 조금의 신경성 위궤양을 앓는 것처럼 잠시 자책할 뿐 또다시 작심삼일을 향해 뭔가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

반복은 이처럼 가벼운 성질이라고 생각할 즈음에 하나의 소식을 접한다. 요즘 농가를 휩쓸고 있는 구제역이다. 이번 구제역도 걸핏하면 발생했다가 사라지는 반복의 소동에 불과하겠거니 싶어 허투루 보다가 나는 소스라친다. 금번 구제역은 만만치가 않았다. 23일 현재 바이러스에 감염될 우려가 있는 소나 돼지를 살처분한 양이 무려 27만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가축을 사람과 다름없이 여기는 농가의 정서를 감안해 볼 때, 마치 27만 명의 인구를 가진 한 도시가 궤멸한 것처럼 느껴진다. 도시인들이 갖는 구제역의 공포는 기껏해야 대형마트의 육류 코너에 가서나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구제역은 27만 마리가 살처분이 되고도 아직 그칠 줄 모른다. 나는 그제야 반복이 가벼운 게 아니라 실로 무겁고 무서운 것이구나! 혀를 찬다. 질병이 둔감한 육체를 통해 번성하듯이, 반복도 우리 감각을 마비시킨 뒤에 우리를 무너뜨리는구나 싶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했던 '반복'에 대한 고찰은 철학자 니체의 재귀사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인 '영원한 재귀'는 뜻을 파악하기가 알쏭달쏭하지만 한 인간으로 하여금 내적인 생성(生成)을 끝없이 반복해서 되살린다는 의미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줄기차게 반복되고 되살아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반복은 우리의 감각을 잠시 둔감하게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마비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도록 한다. 일회성으로 스쳐 지나가는 게 아니라 잊을 만하면 되풀이하면서, 펄떡이는 물고기처럼, 생명 있는 것들을 각성시킨다. 그게 기쁜 것이든 비통한 것이든. 그 때가 연말이든 연시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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