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 간다. 2010년을 매듭짓는 12월 하순. 벽에 걸린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하다. 어느 해인들 순조롭게 지난 적이 있었으랴만 올해도 힘겨운 날들이 많았다. 6'25전쟁 후 우리를 가장 불안하게 했던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을 비롯한 다사다난했던 일들이 세월에 흘러가고 있다. 이제 조용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날의 반성과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생각들이다. 지금까지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얼마나 성실하게 실천하며 살아온 것일까. 경인년 새해 새 달력 앞에서 가졌던 자신과의 약속을 떠올려본다.
새해가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주고받는 인사말이 있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흔히 주고받는 이 인사말에서 묘한 삶의 경륜과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복(福)은 안락의 근원이다. 복은 설탕이나 꿀처럼 달콤해서 모든 사람이 서로 가지려고 아우성이다. 옛날 우리 어머님들은 곧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시집갈 때 무거운 예단 바리바리 싣고 가지 말고, 무겁지 않은 복이나 끼고 가라고. 복에 대한 끈질긴 집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복은 아무에게나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복은 자기 자신이 짓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 복은 반드시 지은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적은 액수의 돈이지만 차곡차곡 모아 은행에 예금해 두어야, 훗날 그 돈을 찾을 수 있다. 한 번도 예금하지 않은 채 은행에서 아무리 기다려 봐야 예금을 찾을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던가. 복을 짓기 위해선 부지런해야 한다. 부지런한 새가 먹이도 많이 잡는다고 하지 않던가? 또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겸손) 오기를 버려야 한다. 흔히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는 사람은 많다. 사우나탕 같은 곳에서도 낑낑대며 애를 쓰는 사람을 본 적은 있어도 오기를 버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던 스님의 법문이 떠오른다.
한 해를 보내며 삶에 활력소가 되어준 글벗을 만났다. 깊어가는 겨울, 글벗과 함께 찻집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문학 얘기며 문학단체 얘기며, 끊임없이 얘길 나누며 사라져가는 한 해의 아쉬움과 슬픔을 잠재운다. 그래도 이 시간은 참 편안하다. 마음 맞는 사람이랑 주고받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니까.
돌아오는 길, 밤이 깊어서인가. 도로에는 차들이 뜸하다. 보도 위를 걷는다. 내 발끝의 둔탁한 구두 소리를 들으며 인적 드문 길을 걷는다. 네온사인 불빛도 사라진 가게 앞에서다. 한 할머니가 허리 숙여 종이 박스를 펼쳐 납작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면장갑을 낀 손으로 박스의 네 귀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연로하신 분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이다. 자신의 몸조차도 가누기 힘들어 보인다. 이 어둡고 늦은 겨울 밤에 무슨 사연일까. 아들을 잃어버리고 집 나간 며느리를 대신해 손자들 학비 때문에 저렇게 박스를 모으고 있을까. 아니면 늙고 병든 남편의 병원비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홀몸노인일까. 알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선 물어보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안쓰러운 마음이 인다. 내가 곁에 서 있건만 할머니는 아랑곳없이 어둔한 몸짓으로 하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박스는 다시 두 꾸러미로 불어났다. 할머니는 또 다른 가게 앞을 기웃거린다. 또다시 펼치는 작업을 계속하리라. 나는 발길을 아파트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늦은 밤 박스 접는 할머니의 잔상은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사람의 운명이란 있는 것일까. 왜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늙어서까지 고생하고 어떤 사람은 일생을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현재의 내 삶을 보면 내가 살았던 과거가 보이고 내세를 알려면 지금 내가 행하는 현재를 보라던가. 성공하였지만 불행한 사람이 있고, 성공은 못했지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행복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지 않던가. 할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또한 오늘의 고달픈 일들은 행복한 미래를 위한 저축이라고 믿고 싶다. 할머니의 모든 시름을 다 실어 경인년과 함께 보내고 싶다. 이것이 할머니를 위한 나의 바람이 아닐까.
허정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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