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다산초당과 녹차

입력 2010-12-16 14:10:40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어디일까. 건교부는 '길 중의 길' 공모에서 삼천포 대교를 대상으로 뽑은 적이 있다. 그 외에도 문경새재 옛 길, 하동 포구 십리 벚꽃 길, 구례 하늘 아래 첫 동네 심원마을 가는 길 등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다.

여행을 하면서 '길'을 화두로 삼으면 달리는 먼 길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암벽에서 떨어져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등산가가 오로지 기억만으로 바위 벼랑에 붙어 하겐을 박고 카라비너를 걸어 하늘로 올라가는 '환각의 다리'와 똑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이렇듯 추억이 깃든 아름다운 생각은 곧잘 명상에 들게 하고 그 명상은 나 같은 속인(俗人)을 선(禪)의 경지로 인도하기도 한다.

답사전문가들이 흔히 말하는 '남도답사 일 번지'라는 강진의 다산초당 어귀를 지나칠 때마다 '아름다운 길'에 대한 상념은 거의 절정에 이른다. 앞서 말한 아름다운 길의 진선미는 눈에 보이는 예쁜 현상에만 높은 점수를 준 표피적인 심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과 추억 그리고 인정이 녹아 있는 길의 아름다움을 무시한다면 정신을 배제하고 육체만 중시하는 결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서 불가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의 상위 개념이라고 경전을 통해 말하고 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정이 흐르는 오솔길'을 대상 뽑겠다

내가 만일 아름다운 길의 심사를 맡는다면 현장 답사를 생략한 채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정이 흐르는 오솔길'을 대상으로 뽑겠다. 선비인 다산과 승려인 혜장선사의 주고받는 말소리가 조곤조곤 지금도 들리는 듯한 그런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은 귀양 온 다산이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기거할 때 이웃 백련사 스님을 만나 서로 오가며 생긴 길이다.

두 어른의 우정의 이면에는 다산을 존경했던 스물네 살 아래인 추사와 동갑내기인 대둔사 초의선사의 작용이 큰 듯하다. 다산초당 마당에는 솔방울을 태워 차를 끓이는 다조(차 부뚜막)가 있다. 만덕산에는 야생 차나무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렸는데 정약용 선생은 산 이름을 호로 삼은 것이다. 차를 좋아하는 선비와 승려의 만남은 만덕산 골짜기에 노천 다실을 차리게 했고 그곳을 내왕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낸 것이다.

#이 길은 차와 시가 오르내린 문학의 길

간혹 대둔사 초의선사에게서 햇차 꾸러미가 혜장에게로 전해오면 선사는 외던 염불조차 버리고 차 봉지를 움켜쥐고 초당으로 숨찬 걸음을 재촉하여 올라왔을 것이다. 그리움이란 남녀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차를 좋아하는 두 선객(禪客)들은 솔방울에 불을 지피면서 연기에 눈물깨나 훔쳤을 것이다. 혜장이 돌아간 후 다산은 우정에 관한 시를 지었을 것이다. 그 시가 마음에 들면 야밤이라도 달빛 등불을 앞세워 백련사로 내려가 "이보게, 자네가 내려간 뒤 시 한 수를 지었네."하고 낮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차와 시가 오르내린 문학의 길이 된 것이다.

삼월 초순이 지나면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에는 동백나무에서 송이째 떨어진 동백꽃들이 붉은 융단 길을 만든다. 동백 숲 속 부도 밭을 지나 키를 넘는 신우대 숲을 넘어서면 발아래 백련사가 있다. 멀리로는 남도의 원색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들판 너머 구강포의 너른 바다가 보인다.

남도 여행을 할 땐 반드시 다산초당에 오를 일이다. 다산 카페 차 부뚜막을 차상으로 삼아 녹차 잔속에 녹아 있는 푸른 기운을 마시고 싶다. 그러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따라 백련사로 내려가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 걷는 두 어른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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