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욱의 박정희 이야기] (7)혁명을 꿈꾸던 시절(중)

입력 2010-12-16 14:45:07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혁명이 일어났다. 그날 밤 8시를 기해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와 함께 포고문 제3호를 통해 계엄사령관에 장도영 2군사령관,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에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 그 밖에 대구지구에 윤춘근'광주지구에 박현수'대전지구에 임부택 소장을 각각 임명하였다. "군대는 정숙히 서울로 들어왔다. 그들은 데모 대원들에게 손뼉을 치던 연도의 구경꾼들로부터 환영의 갈채를 받았다. 몇몇 군인들도 미소 짓고 손을 흔들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박정희 소장의 심정은 복잡했다. 자신이 뒤집어 엎으려고 했던 이승만 정권이 학생 시위로 넘어가는 것을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친구들의 증언에 따르면 "에이, 술맛 안 난다"며 되뇌었다고 한다. 아마도 학생들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불편한 심정의 토로였으리라.

그 뒤 군 내부에서 성분에 문제가 있는 장교들을 전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 소장을 좌익 전력자로 분류해 전역시키기로 결의하였고, 그 같은 결의가 즉시 탐지됨으로써 혁명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2군 부사령관으로 밀려나 있던 박정희 소장으로서는 광복 직후의 좌우익 대결 시기에 좌익에 가담했던 것이 꼬리표가 되어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다. 그 같은 강박 관념이 그를 절박하게 혁명의 길로 몰아붙였을 뿐 아니라 강제 전역이냐, 혁명이냐의 시간 싸움이기도 했다.

지기지우였던 구상(具常) 시인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털어 놓았다. "귀로(歸路), 대구에서 만난 박정희는 이미 눈에 핏발이 서려 있었다. 내가 피정(避靜)의 여운으로 화제를 쇄락으로 몰고 가도, 주정 섞인 목소리로 '해치워야 해'" 소리를 연발하면서,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 떼들을 보네' 라는 내용의 한시 구절로 된 일본 전국시대 대결전의 노래를 되풀이 해 불렀다. 40일 만에 돌아온 서울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4'19의 젊은이들은 몽둥이를 들고 의정 단상을 점령하는가 하면 맨손, 맨발로 휴전선을 넘어 북한마저 해방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박정희 소장은 허름한 막걸리집을 무척 좋아했다. 남산동 향교 부근에 있었던 '말대가리집', 남산동 언더배기에 있었던 '도로메기집', 서문로 옛 영남일보 맞은편에 있었던 '감나무집', 동성로 옛 해동라사 부근에 있었던 '석류나무집' 같은 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 가운데 구상 시인, 이용문 장군, 공국진 준장이 한자리에 앉으면 박자가 척척 맞았다고 한다. 취기가 오르면 박정희 소장이 혁명론을 청산유수로 털어놓았고, 이용문 장군은 옆에서 맞장구를 쳤으며, 구상 시인이 거드는 식이었다. 배석한 사람들을 의식해서 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조지훈 시인, 이병주 국제신문 주필, 왕학수 고려대 교수 등과도 어울려 밤늦도록 마셨고, 이튿날 '국일집' '청도집' 같은 데서 해장국으로 속풀이를 했다고 한다. 그뿐이랴.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도 막걸리를 좋아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 시절 자주 드나들던 곳이 대구의 청수원(淸水園)이라는 요정이다. 청수원은 권번에서 예법을 익힌 김태남이 운영하던 오래된 술집인데, 그녀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 요정계의 좌장 노릇을 하였다. 대지 990㎡(300여 평) 규모의 골기와 한옥으로 마당에는 향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었다.

5'16 혁명을 모의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박정희 소장이 주인 김태남을 누님이라 부를 정도로 각별하게 지냈다. 그 뒤 1976년 김태남이 타계했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비서실 직원을 보내 그의 죽음을 애도했었다. 1978년 유일한 피붙이인 그녀의 딸이 건물을 허물고 빌딩을 세워 태남빌딩이라 이름지었다.

그때 그 시절 김태남과의 일화 한 토막을 옮겨 적는다. 5'16 혁명 직후 민기식 장군이 2군사령관으로 부임하자 박정희 부사령관이 있을 때 갚지 않은 술값이라며 500만 환을 청구하더란다. 두 달쯤 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대구를 시찰한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100만 환을 내놓으면서 앞으로는 현금으로 술을 먹으라고 했다던가.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1962년 화폐개혁으로 '환'이 '원'으로 바뀌면서 10 : 1로 평가 절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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