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닭에 대한 추억이 하나 있다. '구구단'을 배울 무렵의 나이니까 초등학교 3학년, 9살 때의 추억이다. 6'25전쟁이 끝난 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병아리라도 길러 부업을 해야 했다. 우리 집도 예외가 못 돼 비좁은 안방 구석에까지 담요로 둘러싼 병아리 닭장을 만들어두고 이른 봄 내내 냄새를 참아가며 길렀다. 자식 공부에 기합이 세셨던 아버지는 구구단 시험을 칠 때마다 꼭 닭장 위에 세워놓고 회초리를 들었다. 방이 비좁으니 마땅히 올려 세울 데가 없었기도 했다.
'2×2는 사' '2×3은 육' '2×4 팔'까지는 잘 나가다가 '2×5'쯤에서 헷갈리고 있으면 가차 없이 종아리에 회초리가 날아왔다. 몇 대 맞고 나면 정신이 차려지기는커녕 가뜩이나 헷갈리는 구구단이 완전히 뒤엉켜 버린다. 머릿속이 해킹당한 컴퓨터처럼 '버그'가 나버린다. 발밑의 병아리들은 회초리 소리에 놀라 이리 우르르, 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던 추억이다. 닭장 회초리 덕인지 초등학교 때는 셈본(수학) 성적이 꽁지는 면했던 것 같은데 결국 대학 졸업 때까지 수학은 밥맛없는 과목이 됐고 지금도 숫자 개념이 없어선지 돈벌이엔 젬병이다….
최근 어느 숫자 개념 좋은 재벌 그룹이 5천 원짜리 통닭을 '통 큰 통닭'이란 브랜드를 붙여 세일하는 통에 온 네티즌과 동네 통닭집들이 아우성인 모양이다. 계산 밝은 재벌이 벌인 장사니까 분명 돈벌이는 될 것 같은데 계산이 젬병인 필자 눈에도 뭔가 주판이 안 맞는 것 같다. 국산 생닭을 기름에 튀기고 양념 바르고 포장해서 파는 제조와 유통 단계는 기존 골목길의 ○○치킨, △△통닭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엇비슷한 닭에 엇비슷한 양념과 가공을 한 통닭을 어째서 한쪽은 5천 원에 팔고 한쪽은 1만~1만 4천 원에 파느냐는 게 쟁점이다.
재벌이 뭐 할 게 없어 쪼잔하게 동네 통닭 사업에까지 끼어드느냐는 비난이나, 5천 원으로도 맛있는 통닭을 만들어 팔 수 있는데 뭣 땜에 바가지를 써야 하느냐는 반론들은 서로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동네 통닭이 재벌 마트 통닭보다 비싼 속내를 보면 영세한 동네 통닭 가게 주인들의 욕심 탓만은 아닌 것 같다. 그분들은 한 마리라도 더 싸게 많이 팔고 싶지만 소위 프랜차이즈회사에 양념 값에서부터 박스 값, 가게 인테리어비, 간판, 조리 기구, 브랜드 사용료를 내야 한다. 전국 수백, 수천 개 체인점을 통해 거둬들이는 힘센 거대 프랜차이즈회사들의 이익 폭이 과다할 경우 가격 거품이 끼어들어 동네 통닭은 비싼 통닭이 되고 좀 이상한 재벌 통닭 값이 정의(正義)가 된다.
어느 쪽 가격이 적정한 사회적 정의인지 정부든 NGO든 누군가 계산해내 시비를 가릴 필요가 있다. 정의가 힘센 자들만을 위한 정의가 돼서는 상생(相生)의 정의사회를 만들어 갈 수 없고 그런 사회는 결국 너나 모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힘센 폭력이 춤추는 국회를 보라. 국익의 완급과 국민 복리(福利)에 맞춰 세금을 나눠 쓰는 예산 의결에서 영유아 필수 예방접종 예산(338억)을 빼먹고 방학 중 결식 아동 급식 지원비(285억)와 A형 간염 백신 예산(62억)을 날렸다. 추운 겨울 경로당 난방비 지원도 절반(218억)이 잘려 버렸다. 날아가 버린 예산의 수혜자는 누군가. 경로당 노인, 결식 아동, 서민집의 영유아, 환자들이다. 강한 자들은 없다. 반대로 국회의장, 대통령 형님, 예결특위위원장이 챙긴 지역구 연관 예산은 무려 2천억. 경로당 노인 난방비, 결식 아동 급식비, 영유아 접종비 총액(903억)의 딱 2배다.
같은 기간 미국 의회가 한 일을 보자. 속칭 '이어마크'(Earmark=동물의 귀에 자료 표식을 찍는 마크로, 정치적으로는 특정 의원의 지역구 이익을 위해 찍어서 배정한 예산) 심의에서 무려 150조 원의 선심성 예산을 몽땅 삭감했다. 힘센 자들끼리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힘센 자들은 5천 원짜리 통닭에서 수십조 원의 국민 세금까지 '제멋대로' 주무른다. 그 사이에 서민의 피는 마르고 등골은 휘고…, 이게 무슨 정의사회인가!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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