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의 시와 함께] '행복' 방민호

입력 2010-12-13 07:49:04

#'행복'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 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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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이지만, 잠자리에 나란히 누운 늙어가는 아내와 신혼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벌써 삼십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서울 외곽 휘경동 낡은 주택가 골목 안 단칸방 시절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곤 한다. 유난히 추웠던, 한뎃부엌에서 석유곤로에 냄비 밥을 짓고 아궁이 연탄불을 자주 꺼트리곤 하던 시절의 얘기지만, 금세 마음 따뜻해지곤 한다. 어느덧, 회상이나 추억의 힘으로 도도히 흐르는 세월의 물결을 버텨내는 나이에 이른 셈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중요한 일마저 점점 없어지고, 보람이나 성취를 얻고자 하는 의욕마저 자의 반 타의 반 점점 시들해지고 나면, 남는 건 결국 '추억'뿐인 셈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비록 아무것도 가지지 않아 가난했고, "옷 없는 짐승들처럼" 후미진 골목 깊은 곳에 살아야 했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같은 '당신'이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행복하지 않았던가. 젊고 아름답지 않았던가. 누군가 말했던가, '추억에 기댈 줄 아는 자는 행복할 줄 아는 인간이다'라고 말이다.

방민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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