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12월의 약속

입력 2010-12-10 10:55:35

"12월 일정표를 보니 약속들로 빼곡합디다. 그 약속들 사이를 바쁘게 오가다 보면 자신이 꽤 중요한 사람인 듯한 착각도 하지요. 그런데 가만히 그 내용을 살펴보세요. 거의 모두가 밥을 먹거나 소주 한잔하기 위한 약속들입디다. 결국 하느님보다는 내 배(?)를 즐겁게 하기 위한 바쁨이라는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직장 안에 성당이 있어서 평일에도 미사를 하고 강론을 들을 수 있다. 같은 주제라도 신부님들의 성격, 나이, 취향과 경험에 따라 주제를 선정하고 해석하는 시각적 관점들도 달라서 강론을 듣는 시간이 꽤나 흥미롭다.

성당을 빠져나와 달력을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약속이 많은 12월이다. 한 해를 결산하고 정리해야 하는 업무들과 사회적 그물망이 그어진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잊고 지낸 정인과 지인들의 안부까지도 궁금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필사적으로 일정표를 챙기고, 퇴근 후 파김치가 된 몸으로도 약속 장소를 뛰어다닌다. 그러나 이 갸륵한 만남의 책무들도 바라보는 이의 시각적 방향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기도 한다.

연말이 되니 평생 모과와 석류와 마른 명태를 그리며 침묵 속에서 사셨던 아버지가 그립다. 그분 곁에서 나는 자주 화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골똘하게 생각해 보곤 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화실에는 모과와 함께 과일들로 풍성한 정물대가 있었다. 그림이 끝나기 무섭게 과일은 식구들의 입에 넘겨졌지만 모과만은 아버지께 남겨져서 겨울 화실을 향기로 그윽하게 밝혀놓곤 했다. 산촌 내 작업실 마당의 모과나무도 지난여름의 냉해를 견딘 모과를 한 소쿠리나 열었다. 잎사귀도 자잘한 무늬가 박힌 섬세한 가지도 아름답다. 여느 과수나무들처럼 봄엔 수줍은 분홍 꽃을 피우고 늦가을엔 샛노란 열매도 맺는다. 그러나 곧장 우리의 식욕을 채워주지는 않는 그런 나무다.

모과나무의 아름다움을 '성욕 없이 평생 만날 수 있는 여자'에 비유한 시인도 있지만, 당장은 먹을 것을 내어주지 않아 배고픈 모과나무는 아버지 곁에서 내가 골똘히 생각했던 그림이나 예술가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있다.

화가는 그리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보는 사람'이다. 본다는 것은 앎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스스로 점점 투명해지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특히 눈은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도 쉽게 보고 마음의 물결과 파장을 만든다. 시각적으로 가장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을 때라고 하는데, 시각적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연인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려고 먼 곳을 마다하고 달려가지 않는가.

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신비인지도 모르겠다. 기도를 할 때 우리가 자연스레 눈을 감는 것도 그렇게 하면 정신적 시력이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 아닐까.

미술 애호가들이나 감상자들이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한 그 첫걸음은 현대의 화가들이 더 이상 눈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미술사의 양식적 특성들을 좇아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두뇌가 어떤 방식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보는가에 따라 작품들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추상화나 현대미술 앞에서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고 난해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형적 지식이나 감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시대적으로 변화된 화가의 역할과 그 시각적 태도 변화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빈치나 피카소, 마크 로스코 같은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 속에는 과학적인 지식과 종교적 본질을 꿰뚫는 시각적 새로움과 시대적 진실이 담겨있다.

아무튼 나는 화가이면서도 시각적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신앙인으로서의 소명을 생각하며 개인적 욕구를 줄이자는 오늘의 청량한 미사 강론이 12월의 분주한 만남들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한다.

백미혜(대구가톨릭대학교 CU갤러리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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