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예전에 알던 지인이 한동안 연락도 없다가 갑작스레 안부와 함께 이것저것 물어왔다. 그러더니 "미안한데, 부탁이 하나 있다"고 했다. 친척이 병원에 가야 하는데 불안해서 그러니 미리 전화 한 통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런 전화를 한두 번 받는 게 아니다. 하지만 병원비를 깎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보다 세심하고 친절하게 진료해 달라는 부탁이야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대개 그러겠다고 답을 한다.
문제는 이번엔 깜빡 잊고 당부 전화를 하지 못했다는 것. 잠시 뒤에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가, 이래저래 일에 쫓겨 까맣게 잊고 말았다. 황당한 일은 그 다음이다. 일주일쯤 뒤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차!' 싶었다.
변명도 채 꺼내기 전에 그 사람은 연방 "고맙다"고 했다. 덕분에 치료도 잘 받았고 환자도 만족했다는 것이다. 연락을 못 했다고 하기도 되레 미안해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전화를 끊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일단 난처한 상황을 모면했으니 다행스럽기는 한데 오히려 더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생각 끝에 다다른 결론은 '병원의 문턱'이었다.
환자들이 생각하는 병원 문턱은 참 높다. 특히 '용하다'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간 병원일수록 더 그렇다. 기다림이 미덕(?)이 돼 버린 대학병원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문턱이 높을수록 기대치는 낮다. 진료에 대한 기대치가 아니라 친절함에 대한 기대치를 말한다. 이런 괴리감은 서로 반대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병원이 조금 불친절할(의사뿐 아니라 간호사, 원무과 직원 모두) 경우, 으레 그러려니 생각한다. 기대치가 낮기 때문에 불만도 없다. 일종의 체념이다. 대신 2~3분 진료받고 끝날 줄 알았는데 5분이 넘어가고, 퉁명스러울 줄 알았던 대화가 나긋나긋해지면 상황은 전혀 딴판이 된다. 기대 이상의 환대에 감격스러워진다.
사실 병원이 더 친절해지고 아니고는 중요치 않다. 아무리 의사와 간호사가 성심성의껏 환자를 대해도 기자에게 미리 전화를 걸어달라는 부탁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친절해질수록 기대치는 높아지고, 결국 환자는 병원에 가기도 전에 기대치에 못 미치는 의료 서비스를 받게 되지 않을까 여전히 불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문제는 환자가 갖는 막연한 불안감이다.
조금 엉뚱한 얘기지만 미국 경제학자가 쓴 '슈퍼 괴짜경제학'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잠시 보자. 저자는 응급실 의사가 얼마나 믿을 만한가, 어느 의사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내용을 적었다.
"실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 응급실로 달려간 환자가 죽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오히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더 나을 수도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이스라엘, 콜롬비아에서 의사가 파업을 했을 때를 생각해 보라. 지역에 따라 사망률이 18%에서 50%까지 떨어졌다. 의사가 파업을 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병원에 달려가는 것보다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제시한다. 제목답게 '괴짜'스럽기는 하지만 저자는 '연금보험'에 들라고 한다. 연금보험에 드는 사람이 건강해서가 아니라 살아야 받을 수 있는 연금 때문에 더 오래 산다는 것. 아울러 나이 많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각자의 종교 성축일 '이후' 30일간 죽을 확률이 '이전' 30일간 죽을 확률보다 훨씬 높단다. 연금보험과 종교 성축일의 공통점은? 바로 기대감이다. 무언가를 기대하면 오래 산다. 파업이 끝나면 병원에 가봐야지 하는 기대감도 사망률을 줄인다. 병원 문턱에 선 환자들에게 불안감이 아닌 기대감을 심어주기를 바란다면 너무 앞선 것일까? 완치에 대한 기대감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 말이다.
김수용(사회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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