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이군' 추상 같은 절개, 영남 사림파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사람이 진실로 사람의 도리 있어도 걸출하여 절의를 지킨 자 드물건만, 우리 길공께서 아마 거의 근접한 분이리라. 관직의 영광과 형벌의 위엄을, 뜬구름같이 보아 멀리 은거하러 돌아가시니, 고향땅 열 이랑에 초가집 사립문이었네. 온 집엔 서책으로, 높은 관에 큰 옷 입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셨네. 아! 주나라의 덕이 하늘 같아도, 백이숙제 서산에서 고사리 캐어먹는 것 위문치 못하였고. 한나라가 중흥한 때에도, 양가죽 걸치고 동강(桐江)에 은거하여 낚시하던 엄자릉(嚴子陵)을 그냥 두었지. 비록 지금토록 천여 년이 흘렀으나, 진실로 이분들의 마음, 이분들의 이치는 어길 수 없어라.'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 매헌 권우가 지은 야은 길재의 유상찬(遺像贊)이다.
길재는 고려 후기 벼슬이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태종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라는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으며, 1419년(세종 2년) 67세로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길재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후세 사람들은 길재의 높은 충절과 고매한 학덕을 추모하고 있다.
◆출생과 환경
야은 길재(1353∼1419)는 고려 왕조가 기울어가던 1353년(공민왕 3년) 금산군수 길원진(吉元進)과 토산의 사족 김희적(金希迪)의 여식 사이 장남으로 구미시 해평현(현재 해평면) 봉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해평현에서 대대로 향직을 계승하던 토성으로 생원시에 합격한 증조부(吉時遇)에 이어, 아버지 대에 와서 비로소 출사하게 된 전형적인 지방 세력이었다. 그러나 가사를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 탓에 집안의 가세는 기울었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길재는 1363년 냉산 도리사에서 처음 글을 배웠으며, 1370년 박분에게 논어와 맹자를 배우면서 성리학을 접했다. 관료였던 아버지를 만나러 개경에 갔다가 이색·정몽주·권근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22세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31세가 되어 대과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주로 성균관(成均館)의 학정(學正), 박사(博士), 그리고 교수(敎授)와 같은 교육 관련 부서에서 근무했다.
1389년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고려의 쇠망을 짐작해 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구실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후학을 위해 여생을 바쳐
길재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보고 깊은 고민과 좌절에 빠졌다고 한다. 관료로서 갑작스런 왕조의 교체는 충격이었다. 일부 관료들은 새 왕조의 건국 이후에도 관직을 유지하며 연명했다. 동료 관료들도 새로운 왕조에서 관직 생활을 연명했다. 그의 스승 권근마저 새 왕조로 출사했다. 그러나 길재는 신하의 도리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내세워 유혹을 뿌리치고 낙향을 결심했다.
조선 3대 국왕 태종이 된 이방원은 길재와는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던 학문적·정치적 동지였다. 이방원은 기회주의적인 관료들보다는 양심적인 길재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렇지만 그는 출사를 거부해 결국 그의 아들 길사순이 관직의 길로 나섰다.
낙향한 그는 오직 은둔생활을 하면서 후학양성에만 전념했다. 고향에서 길재의 삶은 그동안 중앙에서 갈고 닦은 교육 관료로서의 경험과 책무를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는 금오산 기슭에 서재를 열고 정주학에 기초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선산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글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의 '불사이군'의 충절은 선산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육신 하위지(河緯地)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이 이곳 출신인 것도 이러한 것과 관련이 있다. 훗날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로 이어지는 영남학파 사림을 배출하게 됐다.
이렇게 그의 수하에 있던 많은 인재들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면서 15세기 선산은 성리학의 메카로 부상했다.
18세기 중반 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명저 '택리지(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절반은 일선(선산의 고지명)에 있다"고 선산을 평가했다.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금오서원이 건립돼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령에도 조선 성리학의 발원지라는 상징성이 참작돼 훼철되지 않았다.
◆역사적 평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세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가 망한 후 옛 왕조를 회상하며 지은 야은 길재의 회고가(懷古歌)이다.
길재가 당시의 복잡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 오늘날에는 고집이나 집착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고려시대'라는 특수한 상황을 뛰어넘어 생각해 본다면 그의 절개와 의리를 재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길재의 의(義)는 그가 죽기 1년 전 증명이 됐다. 만약 길재의 충성이 고려시대에 대한 집착이었다면 그의 아들 길사순의 등용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아들에게 "내가 고려에 충성했던 마음을 본받아 너는 조선왕조에 충성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바로 여기에 길재의 의리가 고려시대를 뛰어넘어 보편성을 확보하는 길이 열리는 것으로 보인다.
길재의 절의는 중국의 백이숙제에 비교된다. 길재는 금오산 은거시절 가을에 노란 국화꽃을 꺾어 백이숙제를 제사하였다고 한다. 백이숙제는 수양산에 고사리를 캐 연명했다. 후학들은 길재 또한 백이숙제의 삶의 방식과 유사했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정자 이름을 '채미정'이라 했다.
조선 영조 44년(1768)에 건립된 채미정은 지난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제52호)으로 지정됐다.
구미·전병용기자 yong12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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