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아시안게임 '10종 경기 은메달리스트'
10월 10일 제91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린 진주종합경기장. 운동장 트랙의 골인 지점에 선수들이 늘어섰다. 육상대회에서 좀체 보기 힘든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1위부터 차례로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들은 순위에 상관없이 마지막 선수가 들어올 때까지 한 명도 트랙을 빠져나가지 않고 마지막 선수를 기다리며 박수를 쳤다. 이들은 10종 경기 선수들로, 10종의 마지막 경기인 1,500m에서 꼴찌 선수까지 맞이하는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줬다.
그 중심엔 지난달 27일 끝난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10종 경기 은메달리스트 '철인' 김건우(30)가 있었다. 한국 10종 경기의 '지존' 김건우는 가장 힘든 종목에서 고생하는 선수들 간에 서로 격려하고 힘을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몇 년 전 후배들에게 권유, 이러한 '따뜻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김건우는 "시합에선 서로 경쟁 상대지만 종목이 10개나 되다 보니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 친하기도 하고 가족적인 분위기도 만들고 싶어 시작하게 됐고, 지금은 하나의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김건우는 광저우 아시안게임 10종 경기 마지막 1,500m에서도 경기 후 선수들을 찾아가 인사하고 안아주며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김건우는 1,500m에서 월등한 기량으로 1위로 골인해 종합 점수 6위에서 2위로 껑충 뛰어오르며 짜릿한 막판 뒤집기에 성공, 실력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시아 2인자'에 오른 김건우이지만 육상 인생이 처음부터 평탄했던 건 아니다. 김건우는 초교 때부터 육상을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는 '그저 그런' 선수였다. 포항 남부초교 3학년 때 육상부원이었던 누나와 함께 집에 가기 위해 기다리다 얼떨결에 육상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포항 동지중까지 취미 생활 정도로 육상을 했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전문 육상 선수를 결심하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경북체고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육상 선수로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고3이 됐고 대학에도 가지 못할 상황에 봉착했다. 할 수 없이 육상을 포기하려고 할 때 윤창기(청도 매전중 교장) 감독에게서 "너는 특별히 잘하는 종목은 없지만 이것저것 잘 하니까 10종 경기를 해봐라"는 권유를 받았고, 3학년 중반쯤 10종 경기로 전환했다. 그리고 5주 후 처음 출전한 10종 경기에서 부별 신기록으로 우승하며 마침내 육상 선수로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국내 10종 경기의 '1인자'로 군림하며 전국체전 8연패의 위업을 이어가던 중 최대 위기가 찾아왔다. 족저근막염. 초기에 관리를 제대로 못해 무리하다 증상이 더 심해졌고, 결국 2년간 운동을 접어야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이제 김건우는 끝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김건우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주위에서 말이 많았지만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김건우는 결국 올 전국체전에서 9번째 우승하며 다시 일어섰고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까지 땄다. 아시안게임에서 7천808점을 기록, 2012년 런던올림픽 B기준인 7천800점을 넘어 올림픽 출전 자격까지 획득했다.
100m, 멀리뛰기, 포환던지기, 높이뛰기, 400m(첫째 날), 110m 허들, 원반던지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 1,500m(둘째 날) 등 10개 종목을 기록에 따라 점수를 매겨 합산해 순위를 결정하는 10종은 육상의 철인 경기다. 종목이 많다 보니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아니다. 30분만 쉬고 다음 경기에 나서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회복할 시간도 적다. 이틀 경기를 하고 나면 체중도 보통 4, 5kg 빠진다. 김건우는 "10종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종목마다 집중하고 인내하는 것"이라고 했다.
10종 경기가 힘든데다 인기도 없다 보니 국내 선수는 중·고·일반 선수 다 합쳐 40명 정도다. 김건우는 "처음 10종 경기를 시작할 땐 정말 몇 명 안 됐지만 지금은 10종도 많이 전문화돼 어린 선수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10종만의 묘한 매력도 있다. 한 종목만 뛰는 선수보다 기회가 더 많고, 지고 있어도 다음 종목에서 뒤집을 수 있는 짜릿함이 있다. 또 전략이 다른 종목에 비해 더 중요하고, 완주하면 성적에 관계없이 희열을 느낀다.
김건우의 눈은 벌써 내년 대구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향해 있다. 목표는 8천 점 이상을 기록, 8강에 드는 것이다. 김건우의 최고기록은 2006년 세운 7천824점. 내심 3위 내 입상과 2011 대구 대회에 출전하는 국내 선수 중 최고의 성적도 기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남은 기간 체중을 늘려 열세 종목인 투척을 집중 훈련할 계획이다. 1,500m 등 주력 종목을 조금 소홀히 하더라도 몸을 불리고 파워를 길러 점수를 더 높일 수 있는 투척 종목에 힘을 쏟겠다는 것. 실제 김건우는 아시안게임에서도 1,500m 등 달리기 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냈으나 포환던지기(7위) 등 투척에서 신통찮았다. 김건우는 "투척만 받쳐주면 점수 관리를 할 수 있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창던지기에서 은메달을 딴 박재명 등 후배 선수들에게 원 포인트 레슨을 통해 노하우도 전수받고 있다.
이와 함께 국내에 10종 전문 코치가 거의 없어 대한육상경기연맹에 요청해 해외 8천 점 이상 기록을 가진 선수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해외 훈련도 계획하고 있다.
김건우는 "이제 2011 대구 대회가 9개월밖에 안 남아 훈련할 수 있는 기간이 안 그래도 짧은데 날씨가 추워져 한국에선 내년 4월까지 스파이크를 신을 수 없기 때문에 체력 및 기술 훈련을 병행할 수 있는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날 것"이라며 "부상으로 뛰지 못한 기간 떨어진 자신감을 이번 대회를 통해 다시 찾은 만큼 약점을 보완해 2011 대구 대회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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