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쫓기기 않는 소래포구의 밤
고교 동창들이 팔미도 일몰 풍광을 보러 떠난다기에 무작정 따라나섰다. 지도에서조차 찾아본 적 없는 팔미도는 인천 앞바다에 있었다. 그 섬은 '인생살이가 팔자소관이라면 섬도 팔자려니'하는 투로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바다에 누워 찾아오는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팔자는 길들이기 나름'이란 말도 있지만 '팔자가 곧 운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한데 사람들은 왜 노력은 하지 않고 팔자타령만 하고 있을까.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교훈의 섬
팔미도는 관광을 목적으로 찾아가야 할 섬은 아니다. 쉴 곳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볼 게 많은 섬은 더더욱 아니다. 그 섬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교훈의 섬이다. 1903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대가 세워진 이래 등대지기를 비롯한 필수요원 외엔 출입이 통제된 곳이다. 그러다가 106년 만인 지난해 일반에 개방되긴 했으나 유람선을 타고 들어와서 한 시간 정도 머물다 타고 온 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섬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무인도 상태로 돌아가 빈 밤을 홀로 지켜야 한다.
팔미도의 행정구역은 인천시 중구 무의동으로 인천항에서 남으로 15.7km 떨어진 곳이다. 영종도와 대부도 사이 인천으로 들어가는 뱃길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일제는 서울 진출의 필수 거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이 섬에 등대를 세우고 한반도를 침탈할 밑그림을 그리게 된다. 그들은 옛 주막거리에 술 주(酒)자 등불을 밝히듯 팔미도를 비롯한 우리나라 해안 요소요소에 등대를 세워 어두운 밤바다에 불을 밝혔다. 도둑이 야간에 기동을 하듯 일제는 밤중에 몰래 기어들어 올 수 있도록 내왕 통로에 불을 켜두고 온갖 도둑질을 일삼았다.
#우리 민족에겐 은총의 섬이자 구원의 섬
이 섬 하나를 두고 팔자타령을 하자면 한 번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를 했지만 그 다음 번에는 빨갱이 손에 넘어가려는 조국을 인천상륙작전이란 큰 모험을 통해 구하게 된다. 이 섬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상륙작전의 시발점으로 큰 역할을 해냈다. 대북첩보부대인 켈로부대의 대원들이 한밤중에 팔미도에 잠입하여 등대에 불을 밝히는 것을 신호로 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이 섬은 단순한 섬이 아니다. 우리 민족에겐 은총의 섬이자 구원의 섬이다.
인천부두에서 떠나는 팔미도 유람선은 왕복 2만2천원으로 뱃삯이 만만찮아도 관광객들은 항상 만원이다. 편도 40분을 달리는 동안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안개 낀 서해바다의 암울한 풍경도 한 번쯤 볼 만하고 무미건조한 팔미도의 풍광 또한 도시의 야한 색깔에 지친 피곤한 두 눈에 좋은 안약 구실을 하는 것 같다.
황혼의 나이를 해가 설핏 기우는 팔미도 서쪽 하늘에 잠시 기대고 온 친구들은 "이 섬에는 생선회를 파는 고무다라이 아줌마도 없데에" 하고 불평한다. 이 섬과 맞물려 있는 서해바다는 낙지와 고동을 키우고 있지만 시간과 여건이 그걸 즐기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 그러자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집행부에서 향후 일정을 발표한다. "하선하여 인천 차이나타운을 구경하면서 중국 사람이 빚은 만두 맛을 본 다음에 소래포구로 이동하여 맛있는 광어회를 먹도록 하겠습니다".
정세훈 시인이 쓴 소래포구란 시를 읽어보자. "휘몰아치던 서해 바닷바람은/ 어머니 품안에 찾아들 듯 고요히 안겨오고/ 새우젓배들 너울너울 바람 타고와/ 끝없는 그리움처럼 줄 이어 새벽을 열었겠지/ 이 삼복더위 한낮에 아나고 한 마리 회 쳐놓고/ 포구 저편 바라보니/ 반짝반짝 빛이 되어 오는 염전의 소금 알은/ 견우직녀 하얀 눈물 뿌리던 은하수 아래/ 마당에 멍석 깔아 놓고/ 무릎베개 부채질해주시던/ 그 옛날, 칠석날 여름밤의 어머니 사랑 되고."
기껏 삼사십 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는 팔미도에서 바닷물 내려다보며 입맛 다시던 친구들이 커다란 생선회 접시 앞에선 웃음이 만발이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반백의 노동(老童)들이 연방 입에 욕을 달고 "야, 임마 한잔 해라"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소래포구의 밤은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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