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자만심과 자존심

입력 2010-12-02 10:57:02

북한의 연평도 공격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소중한 생명이 희생된 것도 안타깝지만 무엇보다 국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어설픈 군(軍)의 대응과 적절한 상황 판단에 실패한 대통령과 참모들, 정쟁에만 빠져 허우적대는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좀체 사그라지지 않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처럼 매번 당하기만 하다 장차 동네북으로 전락하지 않겠느냐는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는 목소리가 이전에 비해 훨씬 커진 것도 국민 대다수가 '자존심'을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번 연평도 도발을 돌이켜보면 몽땅 불에 타도 재가 남듯 전부 잃은 것만은 아니다. 잃은 만큼 얻는 것도 있는 게 세상 이치이기 때문이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우리 영토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포탄을 퍼붓도록 방치한 군의 허약함과 정치권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도 때린 놈 편들며 되레 맞을 짓을 해서 그렇다며 황당한 논리를 펴는 종북 세력들의 실체와 이들의 발호를 강 건너 불 보듯 해온 국민의 안보 불감증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은 더 큰 수확이다. 형편이 이 지경인데도 대한민국이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있다면 그야말로 약이 없다.

"부주의로 형주를 잃었다"(大意失荊州)는 중국 속담이 있다. 삼국시대 때 관우가 형주를 잃고 맥성에서 피살당한 일에서 유래된 말이다. 관우가 조조의 번성을 공격하면서 손권 휘하의 여몽의 계략에 속아 배후 경계를 늦추고 남군과 공안에 있던 병력을 돌리는 바람에 형주마저 잃고 고립무원이 돼 죽은 것을 빗댄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관우가 방심하다 형주를 잃고 죽임을 당한 것으로 인식해 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집 세고 자신을 과신하는 관우의 치명적인 결함이 원인이라고 역사가들은 지적한다. 의기나 호기는 좋으나 상황을 냉철하게 통찰하는 능력이 없으면서도 조심성과 경계심마저 부족해 관우 스스로 화를 불렀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꼭 관우 짝이다. '창고에 든 것이라곤 무기밖에 없다'는 조롱을 받는 북한을 상대하면서 무기는 보지 않고 쌀섬만 보며 지나치게 제 능력을 믿은 자만심이 천안함과 연평도 피격을 부른 것이다. 최첨단 무기 자랑은 늘어졌지만 정작 연평도를 지키고 있던 낡은 포는 녹이 슬고 기름이 덕지덕지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우리 정치와 군의 실상이다. 여야 모두 정치쇼나 벌일 줄 알았지 나라 꼴이 어떤지도, 약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당리당략에 목숨 걸고 있는 것이다. 이 틈에 종북 세력들은 연일 김정일 부자 찬양에 목청이 터져나가고 인터넷은 온통 음모론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급기야 일본 산케이신문은 "한국군이 의외로 약하다"고 빈정댔다. 체면 봐서 '의외'라고 표현했지만 실제 '한국군의 전략이나 정신 상태가 까짓것임을 진작에 알았다'고 조롱한 것이다. 청와대와 국회, 군 모두가 이런 청맹과니 꼴이니 국민이 불안해하고 자존심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2차 대전 중 영국 런던 데일리메일 본사 앞 광장에서 성난 군중이 신문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며 매국 신문을 폐쇄하라고 시위를 벌였다. 전장 소식을 전하는 여타 신문들은 늘 승전보를 전하는데 유독 데일리메일만 패전 소식을 써대며 왜곡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데일리메일은 전황에 대한 정확한 팩트를 전달하는 데 충실했다. 영국 정부는 이런 비판을 거울삼아 부족한 부분을 정비했고 국민을 하나로 뭉치는 데 성공해 결국 승전했다. 당시 독일 정치가들은 "데일리메일 때문에 졌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부나 국민들이 말뿐인 단호한 응징으로 호기 부릴 때가 아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고 찬찬히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보는 일이 더 급하다. 서해 5도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강력한 초현대식 무기가 북한 도발을 응징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냉정한 상황 판단과 추호의 도발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국민의 정신 재무장과 단결이 우선이다. 연평도 피격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서둘러 보완하고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햇볕이 필요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徐琮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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