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활의 고향의 맛] 소래포구 꽃게

입력 2010-11-25 14:42:48

아늑하고 따뜻한 포구는 돌아가야 할 마지막 본향

포구는 아늑하고 따뜻하다. 포구라는 소리만 들어도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때로는 양수 속에서 자맥질하며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리울 때도 있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을 때면 머릿속에는 항상 포구를 그린다. 어쩌면 포구는 돌아가야 할 마지막 본향인지도 모른다.

소래포구 앙금처럼 남아 있는 마음의 숙제

포구의 생김새는 여인의 그것과 사뭇 닮아 있다. 두 곳의 육지가 바다로 뻗어나간 그 사이에 포구는 다소곳이 존재한다. 용감한 병사처럼 바다로 돌진해 나간 곶(串)끝에는 통상 등대가 초병처럼 서서 바다를 지키고 있고 포구는 곶을 바람막이로 하여 조용히 잠든다.

옛날에는 포구라 해도 그렇게 북적이지는 않았다. 새벽이면 몇몇 어선들이 통발이나 낚시를 준비하여 바다로 나가고 조업이 끝나면 더러 만선 깃발을 펄럭이며 포구로 돌아왔다. 그때는 여인네가 배를 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하루해가 지루했던 여인들은 심심파적으로 바다를 향해 아이를 낳은 것이 포구 앞 바다 위의 외로운 섬이 되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은 안다/ 섬이 왜 바다에 홀로 떠 있는 것인지/ 떠나간 사람을 기다려 본 사람은/ 백사장에 모래알이 왜 그리 부드러운지/ 섬은 그리움의 모래알/ 거기에서 울어 본 사람은 바다가 우주의/ 작은 물방울이라는 것을 안다/ 진실로 우는 사람의/ 눈물 한 방울은 바다보다도 크다."(원재훈의 시 '섬에서 울다' 중에서)

소래포구란 곳을 가보고 싶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소래라는 그 이름이 좋았다. 소래포구는 인천 외곽의 어디쯤 있다는데 대구에서는 길이 너무 멀어 인연이 쉽게 닿지 않았다. 그래서 소래포구는 앙금처럼 남아 있는 마음속의 숙제였다.

'귀신같이 안다'는 말이 있다. 조상귀신들도 귀신같이 알기 때문에 후손들이 명절 제사를 해외여행 중 호텔에서 지내도 미리 알고 찾아온다는 유머가 있다. 우리 집은 제사를 모시지 않기 때문에 조상님들이 귀신같이 찾아 올 리도 없지만 명절 아침에 올리는 추모예배를 외지에서 지내는 것은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에 살고 있는 딸이 "이번 추석은 딸네 집에서 지내시는 게 어떨는지요. 하루는 북한산 산행을 하고 다음날은 소래포구에서 생선회도 잡숫고요." 한 개의 프로그램 안에 산과 바다가 함께 들어 있어서 옛날 이류 극장의 '이본 동시상영'과 같아 그 멋진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 갈게. 소래포구에는 꼭 가야 돼."

내력과 인정을 인연처럼 만날 수 있을 것

추석 당일에는 도시락을 둘러메고 북한산을 다녀왔다. 다녀와서는 소래포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해보니 상상 속으로 그리던 그런 포구는 아닌 것 같았다. 여태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소래포구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그곳에 가기만 하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력과 인정을 인연처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었다.

시인 곽재구는 '포구기행'이란 책을 쓰기 위해 한반도의 포구를 돌아다녔다. 시인은 육자배기 가락을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사는 할머니를 만나 장터 바닥에서 인생의 심연에서 뿜어올리는 소리를 들었다. 가락을 뽑아 올릴 때의 그 형형한 눈빛을 잊지 못해 시인은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소래포구에 다녀온 네티즌들은 주차난, 야바위 저울, 바꿔치기 상인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랴. 얄팍한 상혼과 정면 승부를 해보기로 했다. "식당에서 생선회를 먹자"는 딸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버지가 하는 대로 따르라"며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펜션 숙박비에도 경로우대를 적용받았던 실력을 발휘하여 2kg짜리 광어 한 마리와 꽃게 한 소쿠리를 착한 가격에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와 근사한 상을 차리게 했다. 이번 소래 행은 딸에게 알뜰 장보기의 시범을 보인 그런 여행이었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