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안내판에 '마령재∼월광봉∼조화봉'이라 엉터리 이름
비슬산 주능선의 천왕봉(최고봉)~1,059m봉 구간을 두고 대견봉~마령재~월광봉~석검봉~조화봉 순이라 안내하는 경우가 있다. 현지안내판이나 자연공원 팸플릿 혹은 사이버정보 등이 그런다. 하지만 근거가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차분히 짚어보자.
주능선은 최고봉인 천왕봉 이후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 내리막을 400여m 걸어 도달하는 곳은 돌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선 지점. 비슬산 주능선이 비슬기맥과 만나는 해발 1,030여m 연결점이다. 비슬산의 북동외곽능선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거길 지나면 주능선은 얼마 후 가장 낮은 구간으로 내려선다. 최저점이 해발 900여m인 곳이다. 그 중 905m잘록이로는 주능선 유일의 동·서간 고갯길이 나 있기도 하다. 각북면 용천사 쪽에서 출발한 등산객들이 참꽃 군락지를 향해 갈 때 처음 올라서게 되는 지점이다.
저 905m 고갯마루를 각북면 오산리 어르신들은 '삼봉재'라 했다. 그 옆에 있는 '삼봉'에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것이다. 여느 집 마루에서도 쉬 올려다 보일 정도로 마을에 뚜렷한 980m봉-974m봉-911m봉 등 세 개의 바위봉우리가 '삼봉'이라 했다. 일제시대 지형도가 헐티재에 잘못 갖다 붙였고, 현재의 국가기본도가 헐티재~천왕봉 사이 어느 봉우리에다 엉터리로 붙여놓은 '삼봉현'(三峰峴)의 진짜 주인이 바로 이 고개인 것이다.
삼봉재라는 이름을 전승해 온 오산리 어르신들 중에는 이 재에 특별한 애상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 어렵던 시절 현풍시장 다니던 고갯길이었기 때문이라 했다. 손수 만든 소나무 서까래를 무겁게 짊어지고 30리 길이라는 현풍장에 져다 팔아야 곡식을 사 죽이나마 끓여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 가야 콩·깨 같은 농산물이나 돼지새끼를 구해 올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런데도 주능선 너머 달성 땅에서는 놀랍게 '삼봉재'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대다수는 이 재의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거기로는 소장수나 넘어 다녔을 뿐 일반인은 그럴 일이 없어 관심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그런 틈바구니서 삼봉재는 지금까지 엉뚱하게 '마령재'로 잘못 안내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마령재는 거기서 남쪽으로 9km가량 더 내려 간 비슬산 남록(南麓)에서 창녕(성산면)~청도(풍각면)를 연결하던 매우 이름 높던 옛날 재인데도 그랬다.
터무니없는 사고는 비슬산 지명이 달성군 중심으로 판단되는 과정서 발생한 것 아닐까 싶었다. 청도 주류(主流)에서 비슬산을 남의 산 보듯 하는 사이, 그 주인이라 자처한 달성군 쪽에서 알지 못하는 지형에 이름표를 붙이려다 보니 무리가 생겼을 듯했다. 거기 재가 있는 줄조차 제대로 모르던 상태서 '마령재'라는 낯선 이름이 들리자 그게 그건 줄 여겼을 가능성 말이다.
삼봉재서 올라서면 1,003m봉이다. 산길이 그 정상부를 거치지 않고 서편 중허리를 감아 지나침으로써 존재감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하는 봉우리다. 하지만 이 봉우리서는 옆구리에 훤칠한 벼랑바위를 낀 괄목할 산줄기가 동편 오산리 쪽으로 내려선다. 그곳 '대동골'을 '물통골'과 '극락골'로 양분하는 능선이다.
1,003m봉을 오산리서는 '극락이' 혹은 '극락봉'이라 불렀다. 그 동편 '극락골'에 있었던 '극락사'라는 절에서 유래한 명칭이라 했다. 절 이름이 지명으로까지 확대된 또 하나의 예인 셈이다.
그런데도 저 전래명칭을 모르는 등산객들 사이에서 1,003m봉은 간혹 '월광봉'(月光峰)으로 통하고 있었다. 만부당한 일이다. 그건 옛 기록에조차 없는 이름이다. 현풍 쪽 기록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건 '월광봉'이 아니라 '월선봉'(月先峰)일 뿐이다. '월광봉'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유일한 책은 최근에 씌어진 '달성군지'이지만, 그건 옛 기록의 '先'을 '光'으로 잘못 베낀 결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게다가 1,003m봉은 '월선봉'일 개연성조차 극히 낮다. 옛 기록은 "대견봉의 남쪽에 월선봉이 있다"고 써 둔 반면, 1,003m봉은 대견봉의 북쪽에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월선'은 '달이 먼저 떠오르는 곳'을 가리키는 듯하며, 산동네들에서 그런 봉우리는 대개 '달등'이라 불린다. 멀리 지리산의 '달뜨기능선'도 '달등(이)능선'의 변음일지 모른다.
비슬기맥 연결점과 '극락봉' 사이의 주능선 동편 골짜기, 비슬기맥을 북편 담장으로 하고 극락봉 동릉을 남쪽 담장으로 한 골짜기는 청도 각북면 오산리 '물통골'이다.
극락봉(1,003m)을 지나면 주능선은 다시 951m잘록이로 내려앉았다가 1,018m봉으로 올라선 후 흔히 '톱바위'라 부르는 특이한 형상의 바위군을 거쳐 1,059m봉으로 마지막 솟구친다.
그 도중의 톱바위를 두고 비슬산휴양림 안내판은 '석검봉'이라 표시해놓고 있다. 칼 같은 바위들이 부채꼴로 삐죽삐죽하게 솟아 톱니 모양을 이루는 게 옛 기록에 나타나는 '石劍峰'(석검봉)의 이미지와 닮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옛 기록은 분명하게 "석검봉은 비슬산의 북쪽에 있다"면서 인접한 봉우리로 천왕봉·수도봉을 들었다. 지금의 톱바위에서 북으로 3km 가까이 떨어져 최고봉 인근에 솟아 있다는 말인 셈이다. '수도봉'을 거론한 걸로 봐서는 그게 주능선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더욱이 톱바위는 뚜렷이 솟은 별개의 봉우리라 보기도 어렵다. 그냥 생긴 대로 '톱바위'라 하는 게 맞겠다.
톱바위에 인접한 1,059m봉은 '강우관측소'로 상징되는 비슬산 제2봉이다. 그 남쪽 면은 대단한 절벽바위로 깎여내려 더 남쪽의 풍각 상수월마을서 '병풍덤'이라 부를 정도로 풍광이 뛰어나다. 병풍덤서 그 마을 쪽으로는 '치이(키)덜겅' '정지(부엌)덜겅' 등 '덜겅'이라 불리는 굉장한 너덜이 둘이나 펼쳐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1,059m봉은 실제 높이와 보는 높이 사이에 편차가 극심한 봉우리다. 청도 쪽에서는 이게 비슬산 최고봉인 듯 생각될 정도로 솟아 보인다. 특히 7층짜리 하얀 관측소 빌딩이 세워진 뒤 비슬산 남사면 풍각 쪽에서는 오직 이것만이 두드러져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비슬산 서쪽 유가면 땅에서는 이 봉우리가 있는 줄조차 제대로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 그 전면(서쪽)으로 1km나 튀어나간 지점에 다소 낮지만 훨씬 두드러지는 1,035m봉이 솟아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1,059m봉에는 '조화봉'이라는 정상표석이 서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게 조화봉이라는 확증은 어디도 없다. '조화봉'은 서쪽 유가면 지역을 중심으로 붙여진 이름일진대, 거기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이 봉우리에 그런 특별한 이름이 주어졌을 가능성도 높아 보이지 않는다.
현장에서 그 일대 명칭으로 통하는 건 오직 '칠분지'(칠푼지)였다. 뜻이 무엇인지는 물론이고, 그게 과연 봉우리 자체를 가리키는 것인지조차 불확실했다. 하지만 '칠분지'는 주변 여러 마을에 큰 편차 없이 공통되게 통하는 이름이었다. 동편의 청도 각북면 남산마을(남산2리) 및 낙성마을(남산3리), 서편의 달성 유가면 가재마을, 남편의 청도 풍각면 상수월마을 등에서 공히 그랬다.
이렇게 분명한 이름을 가진 것은 1,059m봉이 주변 마을사람들에게 매우 밀접한 생활터전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 동쪽 각북면 남산리서는 할머니들까지 그곳 지형을 소상히 알 정도로 누구 없이 끊임없이 올라 다녔던 곳이라 했다. 오산리에선 가물 때 올라 무지(기우제)를 지내던 터라 했다. 근년 가뭄이 들었을 때는 용머리를 누른 탓이라며 강우관측소 건립을 원망도 했다는 것이다.
극락봉과 이 칠분지 사이의 동편 골짜기는 각북면 오산리 '극락골'이다. 칠분지서 동쪽으로 큰 산줄기가 뻗어 그 북쪽의 극락골과 남쪽의 '애골'을 가르면서, 동시에 오산리와 남산리를 구획짓는 것이다. 강우관측소 건물도 저 봉우리가 아니라 이 경계능선 초입에 있다. 1,059m봉 위에 있는 것은 '해맞이제단'이며, 거기서 내려서서 관측소 축대를 따라 걸으면 저 지릉에 진입한 꼴이 된다.
저 '칠분지' 동릉에도 특별히 주목할 지형이 하나 있다. 출발 3분쯤 후 극락골 안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는 3차 지릉에 솟은 908m봉이 그것이다. 오산리 마을서 보면 모체인 1,059m봉조차 가려버린 채 홀로 엄청 뾰족하니 솟았다. 마을서 이걸 '극락이 딴봉'이라는 이름으로 특별히 주목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전래명칭을 모르는 등산지도들이 그것에다 난데없이 '삼각봉'이라는 명패를 억지로 갖다 붙인 이유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딴봉'은 실제 올라보면 미미한 구릉에 불과하다. 평범한 무덤 정도로밖에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 윗부분과 높이 차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 이후 산줄기가 급락함으로써 실제 모습과 보는 모습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여러 산덩이들에서 흔히 겪는 착시현상이다.
극락골은 하류에서 북편의 '물통골'과 합류해 '대동골'을 이룬다. 일대서 가장 깊고 웅장한 골이다. 옛날부터 이름났고 특히 거기 흐르던 '약물'이 유명했었다고 했다. 각북은 물론 이서·각남·풍각 등에서까지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펜션·찻집 등이 여럿 들어서 있으며, 등산기점으로 인기다. 거기서 출발한 뒤 앞서 본 극락봉 동릉을 타고 오르다가 그 남쪽의 극락골을 거쳐 '딴봉' 쪽으로 옮겨 걷거나 북쪽의 물통골 위 '중댕이바램이' 길로 연결해 가도록 등산로가 나 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그림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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