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독서의 계절Ⅰ

입력 2010-11-19 08:07:13

낮엔 밭일, 밤엔 '왕비열전' 읽으시더니 이젠 글이 안보여…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글을 보내주신 분 중 한 분을 뽑아 패션 아울렛 올브랜 10만원 상품권을 보내드립니다. 많은 사연 부탁드립니다.

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욱(대구 남구 대명3동)

다음 주 글감은 '독서의 계절Ⅱ'입니다

♥ 박스 속에 들어가 책 읽는 아들

마트에 가면서 시장 바구니를 준비하지 않아 물건을 상자에 담아왔다. 냉장고에 넣을 것은 넣고 정리한 후 상자를 버리려고 내다 두었더니 아들이 가져와 그 안에 들어가 책을 읽고 있었다. 의자 놔두고 왜 거기서 책을 읽느냐고 했더니 "여기가 편해요"라고 한다.

며칠을 그렇게 들어가 책 읽고 장난감 놀이를 하는 바람에 박스가 낡아 터지자 아들은 베개를 몇 개 쌓아서 이불을 덮어 동굴을 만들어 놓고 저만의 비밀 기지(?)라며 아무도 들어오지 말란다. 어수선한 방을 치우지 않았던 건 내가 어릴 적 그렇게 놀았기 때문이다.

볏짚을 쌓아 놀기도 하고 거기서 책을 읽으면 왠지 집중이 잘 되었다. 볏짚에서 나오는 벼룩에 물려 간지러워 긁으면서도 그 곳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만의 비밀 장소였기에 금서(?) 읽기엔 안성맞춤이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보면 엄마가 읽지 말라고 하신 대목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조숙해진 것 같다. 그러다 바람이 차면 다락방에 숨어들어가 책을 읽곤 했는데 돌이켜 보면 나의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 아니라 '사계절'이었던 것 같다.

아들이 박스 안에 들어가 수학, 과학, 영어 '킹 왕 짱' 만화책 읽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혼자만의 작은 공간에서 책 읽기를 좋아하던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았다. 아들에게 '독서의 사계절'이 되도록 새로운 박스를 구해다 주어야겠다. 작은 독서실이 될 만한 튼튼한 걸로.

문삼숙(대구 달서구 용산동)

♥왕비열전 애독하셨는데 이젠…

유년 시절 겨울방학을 맞아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무료한 시간을 때울 겸 큰집을 찾았다. 그때 나보다 보름 앞선 누나가 날 잡고선 "야~! 선아 나 엊저녁 정말 혼났다."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유인즉 밤 열시나 되었을까 이른 저녁에 출출하던 차에 고구마하나 깎아 먹을 요량으로 중간 방을 찾았고 마침내 고구마 포대기로 막 손이 들어가는 찰라 사랑방 백부님이 "거기 누구고?"하더란 것이었다. 깜짝 놀라 엉겁결에 "예~! 아버지 접니다."하고 대답하니 도리어 방에 계시던 백부님이 뭔 일이가 싶어 더 놀랐단다.

아마도 당시 백부님은 책을 읽고 계셨고 마침 책 구절 중 '거기 누구고'하는 구절을 읽는 중에 일어난 부녀지간의 해프닝이었다. 지금이야 정독이라 해서 모두들 속으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서당을 다닌 옛 어른들은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원칙이고, 초등학교를 다니던 우리들 또한 방안에서 공부를 할 적에 책 읽는 소리가 방문을 넘지 않으면 아예 공부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아 "무슨 공부를 그 따위로 하나!"하는 꾸지람을 들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라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당시 부모님은 놀기에만 열중인 우리보다 더 많은 책을 읽으신 것으로 기억된다. 농번기 때는 좀 그렇다 치고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로 접어들면 저녁상을 물리기가 무섭게 부모님은 가물거리는 호롱불을 벗 삼아 나란히 책을 읽으셨다. 그중 내 기억에 가장 인상 깊은 책은 아무래도 '왕비열전'이라는 책이다. 총 20권으로 보기만 해도 질릴법한 만만찮은 분량이었다. 태조 이성계를 시작으로 마지막 20권까지 다 읽으신 부모님은 옆집을 두루 살펴 저자가 다른 20권의 '왕비 열전'을 빌려다 읽으셨다. 이윽고 그것마저 끝나자 나를 돌아본 어머니는 "난정이 그년은 정말 요물이더라!"란 말에 이어 "연산군, 그놈 그것이 어디 인간이가? 사람 잡는 백정이지! 하여튼 어질고 성군인 성종대왕은 어째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가지고선...!"하시곤 "그래 혹 우리가 읽을 만한 책이 어디 없더냐?"하고 물어왔다.

"없긴 왜 없어요?"하고 당시 내가 부모님께 권해 드린 책은 장길산(황석영 저 총 10권)과 풍수에 관한 2권 짜리 책을 권해 드렸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나를 만난 어머니는 "장길산 그놈은 참으로 숭악(흉악)한 도둑놈이더라!"하시더니 이어 "좋은 명당은 다 임자가 정해져 있더라!"하시며 독후감 아닌 독후감을 말씀하신다. 이제 내년이면 아흔, "이제 글이 눈에 안 보인다."하시며 책을 손에서 놓으신 부모님, 그래도 많은 책을 읽으신 탓에 가끔씩 옛 기억을 더듬어 단종애사를, 또 장희빈을 말씀하시는 당신은 이 가을 책과 함께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이원선(대구 수성구 중동)

♥ "공부보다 책을 읽어라"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한다. 날씨가 선선하니 책 읽기가 딱 좋아서 그런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가을 추수 때문에 엄청나게 바빠서 학교 공부 할 시간도 없었던 시절, 그 시절도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다. 하지만 내게 가을은 '뼈 빠지게 일하는 계절'이었다.

대청마루에 가방 집어 던져 놓고 바로 낫 들고 논으로 가야 했던 시절, 리어카 끌고 끌려가던 우리 집 왕눈이 소와 같은 신세였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봐 주지 않으셨다.

먹을 만큼 일 하든지, 일한 만큼만 먹든지! 선택을 하라며 명령만 내린다. 중간고사가 걸쳐 있어도 인정사정없다. 공부는 학교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들으면 그걸로 다 되는 것이고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께 질문해서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라고 하셨다. 집에 와서는 절대로 공부하지 말라고 하시며 틈이 있으면 책읽기만 하란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시면서. 참말로 책속에 길이 있는지 발견해볼 틈도 없이 가을걷이를 해야 하는 농촌에서의 어린 시절, 그래도 행복했던 추억이 있던 그 시절, 말 그대로 독서의 계절을 맞이하였다.

가을 추수를 다 끝내고 사랑방 윗목에 고구마 가마니에 등 기대어 독서를 하다보면 할머니를 비롯하여 일곱 명이 한 방에서 잠을 잤는데 전등불이 눈부시다고 해 불을 꺼야만 했다.그러면 작은 봉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독서하고, 책 읽다가 심심하면 생고구마 깎아 먹기도 했다.

내가 가장 행복해 했던 계절, 초겨울은 나의 독서의 계절이다. 딱 이맘 때다. 지난주 시외로 나갔다가 텅 빈 들녘을 보니 소몰 듯이 그렇게 인정사정없이 논으로 나를 몰고 가셨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가을 추수를 끝내 놓고 가셨으니 기일도 다가오는구나!

김병욱(대구 북구 태전동)

♥큰 방 사방은 책장으로 빼곡

언니라고 살갑게 대하는 지인 집에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고자 갔다. 부지런한 이미지답게 깔끔하게 정리된 내부 구조들 중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건 부부가 함께 피로를 풀 큰방에 내 키보다 더 큰 책장들이 사방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책의 주인공은 초등학교 4, 5학년인 두 녀석들이다. 우리 집 아이는 독서의 계절이라고 떠들어야 겨우 한 권 읽을 정도인데 기특한 두 녀석은 TV나 컴퓨터 게임보다 독서를 더 좋아한다고 했다. 족히 수천 권이 넘는 듯한 책들을 전부 다 읽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가 30분 정도 머무는 사이에도 책을 3, 4권 읽고 쌓아 놓았다. 두 녀석의 모습이 예쁘기만 했다.

지인은 두 아이한테만큼은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방마다 예쁜 가구를 들이는 것보다 책으로 도배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돌아오면서 내 아이한테 뒷받침도 없이 큰 사람이 되라고 다그친 것 같아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유진(대구 북구 복현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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