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에 했던 말이 생각난다. 10여 년 전 대구의 한 호텔방에서 이뤄진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의례적인 투로 필자의 질문을 받다가 'TK'라는 말이 나오자 안색이 확 달라졌다. 갑자기 눈에서 빛이 나고 목소리가 올라갔다. "보시오" 하며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말부터 튀어나왔다.
"대구경북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수십 년 동안 내가 당한 고통과 아픔 때문에 아주 많이 미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대구경북사람들이 정말 위대하고 훌륭해 보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시점이라 노련한 정치인의 수사(修辭)일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눈빛과 행동에 미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고 믿고 있다. 호텔을 나오면서 '대구경북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봤던 기억도 난다.
그런데 요즘만큼 대구경북이 한심하다고 여겨질 때가 있었던가 싶다. 지역민들이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 처지가 그 정도로 궁색해졌다는 의미다. 얼마 전에는 야당 의원들이 국감장에서 지역을 향해 '보수꼴통 도시'라고 호통을 친 적이 있다. 경위야 어찌 됐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말 실수'나 '의미 전달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고 치자. 그런데 여당인 한나라당에서조차 대구경북을 무시하고 하찮게 보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김범일 대구시장이 한나라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모욕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역에서 최대 이슈가 되고 있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문제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지역 현안을 논의하는 자리였기에 김 시장은 너무나 당연하게 '신공항 조기 입지 결정' 발언을 했다. 그런데 부산 출신인 김무성 원내대표와 서병수 최고위원이 말을 가로막으며 논의 자체를 못하게 했다. 지역에서는 '하늘길을 열자'고 그렇게 소원하고 있는데 한나라당 지도부는 지역 여론을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그렇다고 신공항 문제가 금방 해결될 것도 아니다. 정부도 한나라당과 마찬가지로 입지 결정을 계속 미루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 당초에는 올해 말까지 결정하겠다고 했다가 또다시 내년 3월이라고 말을 바꾸고 있다. 지역민들의 관심이 줄어들면 은근슬쩍 없던 일로 하고 싶은 분위기인 듯하다. 신공항은 지역 존립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인프라인데도 정부와 한나라당의 책임 회피로 인해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역민들이 '보수꼴통'으로 매도당하면서까지 선거 때마다 한나라당을 밀어주고 당의 존립 기반이 돼왔다는 점에서는 너무나 처참한 대가다. 속된 말로 돈 주고 뺨 맞은 꼴이다.
일회성 해프닝이라면 좋으련만 앞날을 생각하면 더 한심해진다. 여당 지도부를 부산 사람들이 장악하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김 시장보다 더한 모욕을 받기 십상이다. 국회의장, 부의장, 원내대표, 최고위원 같은 고위 당직에 부산 출신들이 줄줄이 포진해 영남권 전체의 이익보다는 신공항을 가덕도로 가져가든지, 김해공항을 확장하든지 부산 지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쯤 되면 대구경북 출신 의원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대구경북에 26명의 한나라당 의원이 있건만 지역의 이익을 위해 얼마만큼 힘을 보태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지역민을 위해 몸을 던지는 의원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려 하거나 보신을 위해 바쁘신 분들만 눈에 띄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지역에 그 많은 의원들이 있는데 당 지도부에 입성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역 사람들이 정치인을 바르게 뽑지도 못했고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다는 자괴감만 더해진다. 대구경북의 위대함과 저력은 한낱 추억에 불과한 것일까. 현실이 아무리 고달프더라도 신공항 문제만큼은 해결하고 가야 한다. 그래야 지역에도 미래가 있다. 국회의원들에게 헛된 기대를 품지 말고 지역민들이 힘을 더 모아 반드시 이뤄내야 하지 않겠는가.
박병선(사회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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