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복주의 대표이사로 21년째 활동해오고 있는 김동구 사장. 하지만 그는 의외로 언론에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그렇다고 언론을 피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모습을 드러내지만 제대로 된 언론 인터뷰를 해 본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그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십년치 기사를 검색해 봐도 회사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냥 맨땅에 부딪쳐서 인간 김동구를 알아보자 마음먹었다.
그는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자신과 가족, 회사 이야기를 털어놨다. 커피 한잔 하겠느냐며 가져다준 커피에는 설탕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음식에 간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금 설탕 많이 먹어 몸에 좋을 것 없고, 미각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기술연구소에 들러 소주 맛을 보는 것으로 한 주를 시작한다. 자사 제품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일일이 맛을 보고, 경쟁사의 제품도 하나하나 맛을 본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는 "내 방 한번 볼래요?"라고 물었다. 사장 방에는 그 흔한 소파 하나 없는 대신 큼지막한 탁상과 걸상이 있었고 그 위에 서류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는 "실속형 인간이라서 그렇다"며 "간단한 회의는 이곳에서 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의 의자 뒤에 놓인 에스프레소 머신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굳이 귀찮게 비서에게 시킬 게 뭐 있느냐"며 "내 입맛에 맞게 직접 만들어 먹는 편이 편리해서 아예 사무실에 하나 가져다 뒀다"고 설명했다. 강건한 외모 뒤에 숨어있는 의외의 소탈한 모습이었다.
-지역 사회에서 금복주가 차지하는 위상에 비해 대외적으로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것으로 비친다. 왜 그런가?
▶지역 사회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이런저런 말들에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다. 대구가 워낙 보수적인 도시이다 보니 '지가 뭘 안다고'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 보니 대외활동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예전 선친(김홍식 회장)께서는 1982년부터 88년까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쳤다. 당시에는 이런 아버지를 보필하기 위해 이리저리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역할을 내가 도맡아야 했다. 하지만 선친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시고 난 후에는 가급적 '나서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한때 대구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바꾸고, 경영인들의 단합을 위해 앞장서 보려 한 적도 있었지만 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난 후부터였던 것 같다.
-주류업체 사장은 늘 스케줄이 술자리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것만 같고, 가정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것 같은데,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떤가?
▶아내는 나보다도 대외활동을 더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냥 아이 셋 키우는데만 전념했고, 이제는 편안한 노후를 즐기는 평범한 가정주부일 뿐이다. 아직도 김치 담가서 객지에 나가 있는 아이들에게 부쳐주는 것이 즐거움인 사람이다. 아이는 셋을 뒀다. 31살인 맏딸은 현재 결혼해서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얼마 전 외손자를 낳았다. 이제 태어난 지 2개월쯤 됐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컴퓨터 화상채팅을 통해 얼굴을 보는 것이 낙이다. 28살인 둘째딸 역시 미국에서 공부중인데 너무 말라서 걱정이다. 늘 뭘 먹었는지 챙기는 것이 내 임무다. 27살 막내 아들은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이제 졸업반이다. 아이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통화도 자주 한다.
-38살 꽤 어린 나이에 2세 경영인으로 회사를 물려받았다. 어려움은 없었나?
▶27살에 군 제대하고 두 달 동안 실컷 놀다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회사에 들어왔다. 원래 체육교육과를 졸업했는데 그렇다고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입사를 했다. 당시 홍보실과 기획실 업무 등을 두루 배웠다. 1987년 총괄 전무를 맡고 있던 중 갑작스럽게 사장을 맡게 됐다. 아버지께서 대구상의 회장직을 맡다 보니 회사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내가 회사 경영을 책임지게 된 것이다.
겁없이 맡긴 했지만 사실 부담이 컸다. 보수적인 도시이다 보니 행동하기가 굉장히 불편했다. 나는 열심히 해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고 생각해도 나이 많은 어른들 눈에는 아이로만 보였을 거다. 그래서 다른 기업 하는 어른들이 인정을 잘 안 했다. 선친이 일궈놓은 기업을 물려받는 것이다 보니 그 업적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됐다. 늘 아버님께서 일궈놓은 회사를 내가 망쳐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짓눌렀다.
-지금 아들이 27살 대학 졸업반이라고 했다. 김 사장님이 회사 입사했던 나이와 똑같다. 아들에게 경영수업을 시킬 생각은 없나?
▶현재 아들은 여러 군데 입사서류를 내놓고 최종 면접 단계에 있다. 요즘 취업이 꽤 어렵다 보니 서울대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취업이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아 속을 끓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잘 할 거라고 믿지만, 대신 그 녀석이 의기소침하지 않을까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신경이 쓰인다. 아들은 패션·의류 쪽에 관심이 많아서 그쪽으로 적성을 살리고 싶어한다. 나 역시 아들이 나처럼 어린 나이에 회사에 붙잡혀 들어와 가업을 잇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에서 사회경험을 쌓고 많은 것을 배우기를 바란다. 회사는 때가 되면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하는 방안을 고민중이다.
-소주시장 점유율이 전반적으로 하락하는 중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역에서 기업을 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지역의 한계'라는 부분이다. 제품 품질로 봐서는 전혀 뒤지지 않지만 사람들의 '서울 지향성' 때문에 외면받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그래서 현재 지역특화된 제품, 기존 소주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제품을 모색중이다. 소주시장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제품을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소주시장은 이제 사양산업이라고 봐야 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술을 마시는 인구는 줄어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예를 그대로 따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민소득 1만5천달러에서 2만달러 수준까지는 술이 생활에 필수적인 상품이지만, 2만달러를 넘어 3만달러로 향하게 되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레저·취미생활들이 다양해지면서 술에 대한 수요는 급감할 수밖에 없다. 조금 비관적인 전망이지만 10년 후에는 금복주의 소주 매출이 지금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럼 금복주가 미래사회를 준비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좀 더 고급스러운 술에 승부를 거는 것이 방법이다. 현재 경주법주에서 생산되고 있는 화랑, 경주법주, 경주법주 초특선 등의 제품이 10년 후에는 회사에 더 큰 효자상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화랑의 경우에는 얼마 전 경주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만찬주로 쓰일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술이다. 발효주에 대한 기술력과 제품의 우수성으로 앞으로 승부수를 걸 예정이다. 특히 초특선은 일 년에 7천 병만 한정 생산하는 제품으로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처음 사장을 맡은 1987년 금복문화재단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복지재단, 장학재단 등 3개의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복지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가?
▶처음 재단을 만들 것을 제안했던 분이 당시 상무로 계셨던 박범진 전 국회의원이다. 강원도 제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던 그는 학원장학생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며 기업이 해야할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강조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3억원을 가지고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경영을 계속하면서 롤 모델로 삼게 된 사람이 생겼는데 그가 바로 워런 버핏이었다. 그가 지속적인 기부를 실천하면서 3개의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를 본받아 3개의 별도로 분리된 재단을 만들었다. 초창기에는 100억짜리 재단 세 개를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모두들 헛웃음만 웃더라.
-앞으로 포부가 있다면?
▶평생에 가장 보람 있었다고 생각하는 일이 재단을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구경북에서 포항제철 빼고 중견기업이 가진 것으로서는 가장 큰 재단을 만들었다는데 대해 가슴 뿌듯하게 생각한다. 앞으로는 현재 600억원 정도인 재단 기금을 1천억원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다. 가능하다면 1천500억원짜리 재단을 만들고 싶기도 한다. 이 재단기금은 아무도 손댈 수 없고, 몇 백 년 뒤 금복주라는 기업이 사라져도 영원히 유지되는 대구경북민들의 재산이다.
한윤조 기자
◆ "모든 술은 세 잔까지만… 넘치면 실수"
김동구 사장은 술에 대해 "모든 술은 세 잔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주류업체 사장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대단히 의외였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곤죽이 되도록 마셔야 매출이 쑥쑥 오르는 것이 주류업체 아닌가. 하지만 김 사장은 "옛날 어른들은 따뜻한 밥뚜껑에 반주 한 잔을 먹는 습관이 있었다"며 "그처럼 모든 술은 세 잔까지 자제만 할 수 있으면 혈액순환 등 건강에 도움이 되니 세 잔에서 그만두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현재 김 사장의 주량은 소주 반 병. 무리를 해서 많이 마셔야 한 병 수준이라고 했다. 김 사장이 주량을 줄이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부터라고 한다. 젊었을 때는 '주당'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뒤지지 않을 정도의 주량은 됐다. 그는 "한창때는 폭탄주 10잔 정도는 마셨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어느날부터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일이 한두 차례 생겨나면서 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단다. 김 사장은 "한 번은 고객들과 술자리를 가지는데 너무 많이 마시다보니 혼자 옷을 챙겨입고 집으로 도망가버린 적이 있다"며 "당시 손님들이 정말 황당해했는데 이후부터는 딱 기분이 좋을 선까지만 마신다는 철칙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금복주는 소주생산으로 성장해 온 업체이지만 그는 소주보다는 화랑 같은 발효주를 즐긴다. 김 사장은 "화랑을 마실 때 바로 삼키지 말고 잠시 입에 머금어보면 그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며 "깊이가 있는 술이 좋아 화랑을 만들었고, 오랜 연구 끝에 경주법주 초특선을 탄생시켰다"고 했다.
주류업체 사장이 말하는 술의 정의는 '인생'이다. 김 사장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 늘 술이 함께했다"며 "기쁠 때도 한 잔, 슬플 때도 한 잔, 좋은 사람과 함께하며 한 잔 등 인생을 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이라고 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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