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세포는 전기를 생산·전달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을 명령한다. 그런데 여러 원인으로 일부 뇌세포가 기능 이상을 일으켜 갑자기 전기를 많이 생산한다면 이로 인해 행동이상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간질 발작이라고 한다. 한때 치료가 안 되는 천형이라고 여기거나 유전된다고 잘못 생각해서 병을 숨기거나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손은익(55) 교수는 '마음을 치유하는 외과의사'다.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최신 간질 수술법을 국내 최초로 들여와 간질 수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간질 환자들을 위해 지금도 캠페인을 펴고 있다.
◆각성상태에서 뇌수술
"간질 발작이 일어난다는 것은 뇌의 작용, 특히 대뇌 기능에 갑작스런 장애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컴퓨터 고장처럼 엉뚱한 상태가 발생했다는 의미죠. 원인은 매우 다양합니다. 뇌종양, 뇌혈관성질환, 뇌기생충 등의 뇌촬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뚜렷한 뇌병변으로 인한 경우도 있지만 뇌촬영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뇌세포의 병변으로 인한 경우가 훨씬 흔합니다."
첫 간질 발작은 아동기에서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뇌혈관 질환이 잦은 노령기에서도 첫 간질 발작이 흔히 생긴다. 간질은 흔한 병이다. 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는 인구 200명 중 1명 정도로 국내에만 약 20만~30만 명의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산한다.
"간질 환자 중 80%가량은 약물로 치료가 됩니다. 20%가량은 '약물 난치성'으로 분류되는데, 과거엔 치료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선 컴퓨터 덕분에 뇌파를 디지털로 분석할 수 있게 됐고 MRI, CT 등 정밀영상 진단기기가 발달하면서 간질의 원인 부위를 정확히 찾아내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정밀하게 수술하느냐에 달려있죠."
'정밀한 수술'은 말처럼 쉽지 않다. 뇌처럼 복잡한 부위에 함부로 칼을 댈 수도 없다. 손 교수는 환자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뇌 수술을 한다. 깜짝 놀랄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 '국소마취에 의한 각성상태에서 대뇌피질 뇌파검사와 중요 뇌기능 지도화검사를 통한 간질수술법'. 쉽게 설명하자면, 정맥마취주사로 환자를 일종의 수면상태에 빠뜨린 뒤 국소마취로 두개골을 연다. 수술이 필요한 뇌 부위에 전극을 연결하고 정맥마취주사를 중단한다. 정맥마취 공급을 중단하는 즉시 환자는 깨어난다. 의사는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전극이 연결된 뇌 부위가 어떤 기능(가령 운동, 언어 등)을 담당하는지 알아낸다. 간질을 일으키는 원인 부위가 특정 기능과 관련이 없음이 확인되면 일종의 '초음파 칼'로 정밀하게 제거해낸다. 이를 통해 제거가 필요한 최소 부위만 절단해 내는 맞춤형 수술이 가능하다.
◆삶의 질을 보장하는 치료
"말로 설명하면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수술입니다. 어떤 부위가 문제를 일으키느냐에 따라 수술시간이 1시간에서 5시간까지 차이가 납니다. 간질만 치료하려다가 신체마비가 올 수도 있고, 언어나 기억에 문제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손 교수는 1992년 미국 시애틀 워싱턴대학병원 간질센터에서 임상 의사로 1년간 근무했다. 그저 수술장면을 지켜보는 게 아니라 실제 수술에 참여했다. 의대 졸업 직후 미국 내 외국인 의사를 위한 자격시험에 통과해둔 덕분이었다. 1993년 국내 두 번째이자 지역에서 최초로 '간질센터'를 열었다. 첫 해에만 간질 환자 130여 명을 수술했다. 환자 중 70%가량은 서울, 부산 등 외지에서 찾아왔다. 서울 등 다른 지역에 간질센터가 들어설 때까지 4, 5년간 몰려드는 환자들로 쉴 시간도 없었다. 지금까지 모두 800례의 간질 수술을 했다. 현재는 연간 30~40건씩 수술을 한다.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우에만 수술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가령 수술로 간질을 고쳤다고 해도 말을 못하고 기억력도 일부 잃게 되거나 신체 마비가 온다면 환자는 여전히 힘들 겁니다. 비록 간질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겠죠. 그런 위험이 있다면 저는 환자에게 수술을 권하지 않습니다."
뇌종양 수술에도 이런 수술법을 적용할 수 있다. 과거에는 무조건 종양을 일으키는 부위를 잘라내는 게 급선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간질이나 뇌종양의 고통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삶의 질'도 보장하는 치료, 바로 손 교수의 지향점이다.
◆어둠 속의 간질 환자 보면 마음 아파
"대대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형님들을 따라 공대에 진학하려고 마음먹고 있는데, 하루는 목사님께서 '봉사할 수 있는 좋은 직업이 바로 의사'라고 말씀하셨죠. 고 3 2학기 때 진로를 바꿔서 의대에 진학했습니다." 의대 본과 2학년 말 부친이 갑작스레 숨을 거뒀다. 뇌출혈이었지만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했다. 그때부터 신경외과를 전공하겠다고 결심했고 줄곧 그 길을 걸었다.
"전공의 1년차 때였습니다. 너무 바빠서 잠도 못 잘 때였죠. 하루는 새벽 1시쯤 회진을 도는데 병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목 경추를 다친 환자였는데, 당시만 해도 목을 고정시키기 위해 환자를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혀두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욕창이 생길까봐 한 번씩 자세를 바꿔줄 뿐이었죠. 그 환자가 불 꺼진 어두운 병실에서 흐느끼며 혼자 울고 있는 겁니다."
그때 손 교수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치료하는 것은 환자가 아니라 병이구나. 환자의 고통은 보지 못하고 병만 봤구나.' 이후 그는 보다 환자와 가깝게 다가서려고 노력했다. 특히 간질 환자의 경우 가족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져 마음의 상처가 컸다. 이 때문에 수술 전에 환자 및 가족들을 모아놓고 일일이 병과 수술에 대해 설명하고, 이후 어떤 치료를 받을지도 꼼꼼히 알려준다.
"가족들과 대화해 보면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심지어 간질 치료를 위해 해골에 담긴 물도 먹여봤답니다. 그만큼 아직도 간질에 대해 사람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세상 밖으로 병을 알리기 싫어하는 간질 환자를 위해 '장미회'도 만들었다. 매달 100만원 안팎의 치료약을 무료로 처방해주고 있다. 또 '새누리간질재활센터'를 만들기 위해 한창 준비 중이다. "전국에서 간질재활센터는 처음입니다. 난치성 간질환자를 돕기 위해 많은 관심과 격려가 필요합니다. 간질 환자들이 어둠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이준석, 전장연 성당 시위에 "사회적 약자 프레임 악용한 집단 이기주의"
5·18묘지 참배 가로막힌 한덕수 "저도 호남 사람…서로 사랑해야" 호소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민주당 "李 유죄 판단 대법관 10명 탄핵하자"…국힘 "이성 잃었다"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