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심가'로 한국 충절의 대명사, 조선시대 사림파 선비정신 이끌어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는 학자이자 정치가, 외교가, 문인이었다.
일찍이 주자학에 정통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어 '동방이학의 시조'로 추대됐다.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일생 동안 확고부동한 '명분의 길'을 걸었다. 신하로서의 명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명나라 6회, 왜(倭) 1회 등 총 7차례의 사행으로 외교의 임무를 수행했다. 이성계와 여진 정벌, 왜구 섬멸 등에 3차례나 함께 나섰지만 이방원의 역성혁명 참여 제의를 뜻하는 시조인 '하여가'엔 '단심가'로 답하며 고려사직 사수의 뜻을 밝혔다. 포은은 이방원의 부하에게 선죽교에서 최후를 맞았지만, 조선조 왕실과 사림들에 의해 절의(節義)정신을 실천한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됐다.
◆영천 동쪽 우항리에서 출생
정몽주의 호는 포은(圃隱)이며 본관은 영일이다. 아버지 정운관과 어머니 영천 이씨의 장남으로 1337년(충숙왕 복위 6년) 12월 22일 영천 동쪽 우항리에서 태어났다.
최근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211, 212번지 일대에서 생가터 추정지가 발견돼 발굴 조사와 생가 복원을 앞두고 있다.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 때 꿈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뜨려 놀라 잠이 깬 일이 있어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했다. 9세 때 이름을 몽룡(夢龍)으로 고쳤으며 관례를 할 때 몽주(夢周)로 다시 지었다.
19세 때 부친상을 당해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있는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유교의 예법에 따라 상례를 치렀다. 10년 후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지극한 효성을 다해 조정에서 출생지인 영천 임고면 우항리에 효자리란 비를 세워 뜻을 기리고 있다. 당시 고려사회에서 사대부들도 불교의 법도를 숭상해 상례로 100일에 탈상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정몽주는 24세 때 정당문학 김득배와 추밀직학사 한방신이 관장하는 과거시험에서 삼장 모두 장원으로 급제했다. 26세 때 예문관 검열(藝文檢閱)에 임명됐다. 27세 때 무관으로 낭장(郎將)이 됐으며 문관으로 선덕랑(宣德郞)에 올라 종사관이 돼 동북면도지휘사인 한방신을 따라 화주(영흥)에 나가 여진을 정벌하는 전쟁에 종군했다.
포은은 28세 때 이성계를 따라 화주에서 여진의 삼선·삼개를 치는 데 종군했으며 돌아와 전보도감 판관(典寶都監判官)에 임명됐다. 31세 때 예조정랑으로서 성균관 박사(成均博士)를 겸직했으며, 32세 때 성균관 사예(成均司藝)에 올랐다. 35세 때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성균관 직강(成均直講)을 겸직했으며 성균관 사성(成均司成)에까지 올랐다.
이때 정몽주는 주자의 경전주석인 '사서집주'(四書集註)에 조예가 깊었으며 주자학에 정통한 그의 경전강의는 탁월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성균관 대사성인 이색은 "정몽주의 논리는 종으로 설명하거나 횡으로 설명하거나(橫說竪說)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어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시조로 추대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건 사행과 순절
정몽주는 36세 때인 1372년 3월 명나라가 서촉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서장관으로 남경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했다. 정사인, 홍사범은 익사하고 정몽주는 바위 섬에서 구사일생으로 표류 13일 만에 살아났다. 명나라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배를 내어 귀국을 도와줘 이듬해 7월 개경으로 돌아왔다.
1374년 38세 때 경상도안렴사에 임명됐으며 그해에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했다. 39세 때 예문관 직제학에 이어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됐다. 당시 집권자인 이인임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北元)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정책을 추진하자 정몽주는 박상용,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도 이인임을 탄핵했다.
이 일로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으로 유배됐으며 41세 때 풀려났다. 1377년 3월 개경으로 돌아온 정몽주는 9월 누구나 위태롭게 여겼던 일본에 사신으로 떠났다.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 하카다에서 성주를 만나 나라 사이에 교류하는 의리와 이해관계를 설명했고 성주는 그의 해박한 지식과 언행에 감복해 특별히 우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모여들어 시를 청했고 매일같이 가마를 타고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기도 했다. 1378년 7월 포로로 잡혀갔던 수백 명과 함께 일본에서 돌아왔다.
이후 정몽주는 46세 때 2회, 48세 때 1회, 50세 때 1회, 51세 때 1회 등 5회나 더 명나라 사행길에 나서 되돌아오거나 성과를 거뒀다.
1389년 11월 이성계가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웠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러한 공으로 정몽주는 1390년 8월 공신 호칭을 받고 문하부 찬성사에 진현관 대제학·성균관 대사성을 겸해 익양군 충의군에 봉해졌으며 11월에는 수문화시중에 오르고 익양군 충의백에 봉해졌다.
하지만 이 무렵 고려를 지키려는 정몽주와 새 왕조를 세우려는 이성계 사이에는 대립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날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정몽주를 초대해 술잔을 주고받으며 화답한 시조가 '하여가'와 '단심가'이다.
1392년 2월 정몽주는 고려의 정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새로운 법전 '신율'을 편찬했다. 3월에는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세자 일행의 귀국을 영접하러 가던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 낙마해 부상을 입자 이를 기회로 정몽주는 대간(臺諫)들과 함께 이성계의 추종세력인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을 유배시켰다. 4월 4일 정몽주는 이성계의 집으로 문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고 죽임을 당했다.
◆절의정신 조선조 계승
포은 정몽주는 조선왕조 창업세력인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역적으로 매도당했지만 조선왕조의 이방원(태종)에 의해 재평가돼 충신으로 존숭됐다. 태종은 즉위 초 정몽주에게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고 세종 때 편찬한 '삼강행실도' 충신편에 정몽주가 수록됐다.
정몽주의 충절정신은 조선 초기 사림파의 선비정신 핵심으로 계승돼 조선을 이끌어가는 시대정신을 제공했다.
사림의 등장으로 본격화된 정몽주의 추숭활동은 포은을 제향하는 서원의 건립으로 이어졌다. 정몽주를 제향하는 최초의 서원인 임고서원이 1555년 출생지인 영천에 창건된 것을 시작으로, 1573년 개성 숭양서원, 1576년 용인 충렬서원, 1588년 영일 오천서원 및 상주 도남서원, 울산 구강서원, 언양 반구서원 등 13곳에 세워졌다.
임고서원은 퇴계 이황의 주도하에 영천지역 퇴계문인 김응생, 정윤량, 노수 등을 중심으로 부래산에 창건됐다. 퇴계는 임고서원의 제문과 상향축문을 지어 포은의 학문과 충절을 극찬했다.
임고서원은 1584년 '영천구각본', 1607년 '영천중간본' 등 3종의 '포은집'을 간행해 포은 주향처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임고서원 입구엔 포은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아들을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시조 '백로가'와 정몽주의 시조 '단심가'가 나란히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포은의 문집에는 우리말로 지어진 시조 '단심가' 외에 300여 수의 한시가 수록돼 전해지고 있다. 특히 명나라 사행을 떠나서는 두고 온 고국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시로 달랬으며 돌아오는 길에 많은 시를 남겼다. 정몽주가 1368년 당시 부사 이용과 함께 건립해 명원루(明遠樓)라 이름붙인 영천시 창구동의 조양각에는 포은의 '명원루'라는 제목의 시판이 걸려 있다.
이종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포은의 시에는 호방한 기상과 낭만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많다"며 "정몽주는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과 함께 고려 말의 대표적 시인"이라고 말했다.
포은학회 관계자는 "포은의 문집에 없는 시 10여 수가 중국 명나라 문헌에서 새로 발견돼 학술대회에서 정식으로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영천·민병곤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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