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모퉁이 돌면 또 어떤 풍경이 나올까? 가슴 벅찬 설렘이…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눈 쌓인 산길을 걸으며 동행길을 시작한 뒤 작열하는 햇살 아래 팥죽 같은 땀도 흘렸고 옹달샘의 시원함에 작은 행복도 맞보았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하늘은 푸르렀고 마음은 가벼웠다. 다시 김천 땅에 발을 디디게 됐다.
걷기 열풍이 불면서 김천에도 두 곳의 탐방길을 개발했다. 하나는 증산면에 있는 '수도 녹색숲 모티길'이다. 지난겨울 이곳을 찾았다가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눈 때문에 한 차례 포기했다가 봄에 눈이 녹기를 기다려 다시 거닐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찾아간 길은 대항면에 있는 '직지문화 모티길'. 두 곳 모두 워낙 많은 굽이가 있어서 '모퉁이'를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모티'라는 말이 어울린다. 직지문화 모티길은 김천에서 추풍령으로 가는 4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직지사 쪽으로 접어들면 만날 수 있다. 903번 지방도를 따라 직지사로 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오른편 직지초등학교로 가면 된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10㎞에 이르는 짧지 않은 구간이지만 길은 좋은 편이다. 직지사가 내려앉은 황악산(1,111m)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5.5㎞쯤 되는 곳에 동구지산(656m)이 있다. 두 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903번 지방도다. 오늘 답사할 길은 동구지산 동편에서 마을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선 뒤 방하재에서 길을 꺾어 산 남쪽 코스를 가로질러 다시 돌모 마을을 거쳐 직지문화공원으로 가는 코스다. 길의 절반은 오르막이고 숲길 정상부에 올라선 뒤 다시 꾸준히 내려가는 모양새를 띠었다. 자전거 트레킹에도 안성맞춤이다.
직지초교에서 방하치 마을까지 이르는 구간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진다. 원래 모티길은 산자락 아래 농로를 따라가게 돼 있지만 마을을 바로 옆에 끼고 있어서 한적한 맛은 느끼기 어렵다. 작은 돌들을 쌓아올린 돌탑이 인상적인 방하치 마을부터 차츰 오르막이 시작된다. 마을 끝에는 거대한 느티나무(대항면 향천리)가 산길의 시작을 알린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는데 당시 나무 나이가 338년, 높이가 14m로 기록돼 있다. 지금은 366년이나 된 나무인 셈. 나무 둥치 둘레만 7.5m가 넘는 거목이다 보니 그늘이 짙고 넓다.
원래 임도를 이어서 '모티길'을 꾸미다 보니 곳곳에 콘크리트로 포장돼 있다. 오르막 구간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서두름없이 차츰차츰 오르다 보면 어느새 숲 속 한가운데 와 있다. 소나무가 드문 편이다. 거의 활엽수이고 가끔 낙엽송이 눈에 띈다. 봄부터 가을까지 산행하기에는 적합하지만 겨울이면 무척 쓸쓸한 풍경으로 바뀔 터. 하지만 그 역시 색다른 맛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드문드문 나무가 성기게 자란 곳에선 아래쪽 경치를 굽어볼 수 있다. 숲길 정상부에는 갈림길이 있고, 쇠사슬로 내리막길을 막아놓았다. 김천시청 관광산업담당 박운용 씨는 "원래 모티길은 아래쪽 내리막으로 가야하는데 가끔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리로 내려갔다가 차를 돌리지 못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어서 막아놓았다"고 설명했다. 길을 따라 돌모 마을 쪽으로 내려가면 표고버섯 재배지가 나온다. 인근 산에는 산양삼과 갖가지 약초를 심어놓았다. 함부로 이곳에서 약초를 캐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직지문화공원은 김천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많은 조각작품을 감상하며 지친 다리를 쉬어갈 수 있다. 직지사도 빼놓을 수 없다. 신라 눌지왕 2년(418년) 아도화상이 신라에서 두 번째로 지었다는 천년고찰. 다만 사적비가 허물어져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묵호자가 구미에 있는 도리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직지사라는 이름도 '아도화상이 가리킨 손가락 끝을 따라와 지었다'는 설과 함께 고려 태조 19년(936년) 능여가 왕건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면서 '절터를 잴 때 자를 쓰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한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2대 정종 임금의 어태가 안치돼 있으며, 사명대사가 출가 득도한 사찰로도 유명하다. 사명대사는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기도 했으며, 경내 사명각에는 사명대사 영정도 안치돼 있다. 대웅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606호)을 비롯해 5점의 보물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비로전에서 절을 올린 뒤 천불상 중에서 벌거벗은 동자상을 본 사람은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도 있다.
직지사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이 나온다. 이곳에는 안타까운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전국을 떠돌던 한 승려가 경남 합천에 있는 대처승 마을에 당도했다. 촌장은 승려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사위로 삼기로 했으나 승려는 한사코 결혼을 거부했다. 바랑과 장삼을 빼앗고 억지로 결혼시킨 뒤 행여 도망칠까봐 깊숙이 숨겨두었다. 아들을 낳고 살기를 삼 년. 어느 날 아내는 이제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바랑과 장삼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는데, 이튿날 눈을 뜨자 남편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내는 남편을 찾아 전국을 헤맸는데, 어느 날 직지사에 남편과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절 아래 방앗간 집에서 사흘을 묵으며 기다렸건만 남편은 오지 않았고, 결국 남편을 찾아 직지사로 들어가다가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자리에서 그만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어버렸다.
매년 부인이 죽은 날 직지사 승려들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나간 뒤 부인이 죽은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결국 원귀를 위로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 해 한 고승이 찾아와 사찰에 왜 사당이 있느냐고 나무랐다. 연유를 듣고난 고승은 "그러면 이곳에 금강문을 지어 금강역사로 하여금 여인의 원혼을 막도록 하라"고 해서 지금의 금강문이 지어졌단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것을. 그 순리를 거부한 사람들의 안타까운 전설은 전국 곳곳에 무척 많다. 인연의 끈을 부여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때가 이미 늦은 것을 어쩌랴. 오는 듯 가버리는 가을도 마찬가지다. 벌써 날씨가 추워졌다고 푸념할 것 없이 지금이라도 길을 나서면 될 터. 모티길에서 새로운 인연을 꿈꾸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김천시청 관광산업담당 박운용 054)420-6062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정창기 작-모티길
모티길은 정겹다. 힘들지 않아서 좋고, 설렘에 가슴 벅차게 해서 좋다. '직지문화 모티길'은 제법 긴 길이다. 직지초등학교에서 방하치 마을까지는 그저 시골 마을길을 걷는 느낌이고 방하재를 지나 산을 오르면 군데군데 전경을 굽어볼 수 있는 구간을 만난다. 정창기 화백은 "모티길이라는 이름답게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다려지게 만드는 길"이라고 했다. 산을 내려서면 돌모마을이 나오고 지방도를 따라 잠시 내려가면 도착지인 직지문화공원에 다다른다. 너른 조각공원에 전시된 작품도 감상하고, 여유가 된다면 직지사도 빠뜨리지 않고 들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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