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서 화악까지] <44> 옛 교통 요지였던 윙계재

입력 2010-10-30 07:52:43

청도·밀양서 경상감영 가는 길…길목 따라 주막들도 성쇠

왼쪽 689m봉과 오른쪽 조리봉(676m봉) 사이에 있는 윙계재. 686m봉 옆구리에 기생화산처럼 붙어 보이는 게 갈모봉(604m)이고 가장 낮은 곳이 윙계재(514m) 부분이며, 그 다음 잠깐 솟은 건 불개산능선 분기점인 557m봉이다. 이 지형 북편의 정대리 골짜기 건너
왼쪽 689m봉과 오른쪽 조리봉(676m봉) 사이에 있는 윙계재. 686m봉 옆구리에 기생화산처럼 붙어 보이는 게 갈모봉(604m)이고 가장 낮은 곳이 윙계재(514m) 부분이며, 그 다음 잠깐 솟은 건 불개산능선 분기점인 557m봉이다. 이 지형 북편의 정대리 골짜기 건너 '청룡분맥' 상의 673m봉(삼필봉능선 분기점) 남사면 고령김씨 묘원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비슬기맥 고저표
비슬기맥 고저표

청산벌이 끝나고 새로운 구간이 펼쳐지는 시점이라 봐도 좋을 713m구릉 이후엔 '범바위등'(670m)을 먼저 주목해야 한다. '범바위'가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고, 그 북편 평지말계곡으로 들어갈 때 정면으로 가장 뚜렷이 돌출해 보이는 봉우리다. 거기서는 산줄기가 왼편으로 격하게 꺾이면서 고도 또한 순식간에 120m나 폭락한다. 까딱 하산 길로 잘못 빠지는가 싶어 등산객들이 긴장하기 일쑤일 수밖에 없는 지점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틀리지 않은 길이고, 그렇게 내려서는 곳은 '상심미기'(552m)라 불리는 오래 된 재다. 그 남쪽 청도 지슬리서 북편 가창 소매골로 이어 다니던 길목이라 했다. '미기'는 잘록이를 뜻하는 '목'인 줄 알겠으나, 발음 때 '상'에 악센트가 주어지는 저 '상심'은 뭘까?

상심미기를 지난 뒤 산줄기는 591m봉으로 잠깐 올랐다가 다시 567m 잘록이로 내려앉는다. 쇠실마을(금천리)과 평지말을 잇는 또 다른 '상심미기'라 했다. 앞의 것을 '지슬 상심미기'라 한다면 이건 '쇠실 상심미기'인 셈이다. 두 상심미기 너머 함께 도달하게 되는 가창 쪽 골은 '상심미기골'이라 했다. 평지말 상류 '소매골'의 한 지류다.

이 상심미기 구간과 앞으로 거쳐 갈 윙계재 및 헐티재 사이 비슬기맥을 함께 놓고 보면 묘한 흐름이 하나 발견된다. 670m봉(범바위등)~552m재(상심미기)~689m봉~514m재(윙계재)~676m봉(조리봉)~510m재(헐티재)~677m봉을 이어가며 비슷한 높이로의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게 그것이다.

거기 속한 3개 재 중 지금 자동차가 다니는 건 '헐티재'뿐이다. 그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반면 '상심미기'는 존재조차 잊혀졌다. '윙계재'는 요행히 지도에 이름이 올려졌으나 등산객들은 그저 옛날 나뭇길 정도로 생각할 뿐 대수로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현지 어르신들 얘기를 종합하면, 자동차가 흔치않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구와 청도 서부를 잇던 일대 제일의 재는 윙계재였다. 헐티재는 그 인접 오산리 사람들이나 이용했지만 윙계재는 광범한 권역의 주민들이 줄을 이어 다녔다. 청도 각북·풍각은 물론 밀양·창녕 북부 사람들도 그랬다. 조선시대 경상감영 가는 길이었고 근세 대구나 화원시장 오가는 주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길목을 따라 주막이 늘어설 정도였다고 했다.

어르신들 안내를 받아 걸어 본 그 길의 청도 쪽 들머리는 헐티재 남쪽 각북 금천리 '송내'마을이었다. 그 입구 정자 자리가 옛날 주막 터였다. 마을로 들어서자 헐티재(510m)가 머리 위로 빤히 보였지만 옛 어른들은 그쪽을 피했다. 가창 정대로 가기엔 이쪽보다 훨씬 멀 뿐 아니라 높이에서도 결코 유리하지 않아서였다.

대신 길은 또 하나의 주막터를 지나고 '중고개'(382m)를 거쳐 '불개산능선'을 걸어 오르더니 막바지에 '늙은솔골' 안으로 감아들어 윙계재(514m)에 닿았다. '불개산능선'은 윙계재 서쪽에 인접한 비슬기맥 상의 557m봉에서 출발해 중고개 및 '불개산'(436m)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서며 금천리를 '송내'와 '쇠실'로 가르는 능선이다. 마을입구~중고개 20분, 중고개~윙계재 15분 거리였다.

윙계재를 넘으면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윙계골이다. 그곳 물길을 따라 하류로 걸으면 '대구미술광장'(폐교) 인근서 헐티재~가창 사이 도로를 만나 대구로 갈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곳 큰 물길을 건너 초곡마을(정대리) '장단이골'로 들어서면 화원 본리리 가는 옛길과 연결된다. 대구 쪽서 헐티재로 오를 때 폐교 지나자마자 왼편 산 안으로 나 있는 길이 윙계골 진입로다.

윙계골에는 너덧 가구 되는 '윙계' 마을이 있다. 더 동쪽에 있는 '소매골' 마을들과 함께 일제 때 '대암동'(大岩洞)으로 묶였던 동네다. 소매골에는 초입에 '배정'마을(미술광장 동네), 조금 안쪽 최정산 줄기 밑에 '한덤'마을(조길방가옥 동네), 골 끝에 '평지말'이 있다. 옛 대암동 소속 두 골 민가는 합계 20여 호라 했다.

청도 옛 어른들은 소나무를 연목(서까래)으로 깎은 뒤 저 윙계재 길을 걸어 화원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 행렬에는 가창 정대 사람들도 동참해, 써레·쟁기 등등을 만들어 장을 찾아 다녔다. 그때 나무농기구를 내다팔던 들녘 장터가 화원·현풍이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중요한 통로였던 윙계재를 일제시대 지형도는 '梨亭峴'(이정현)이라 표기해 놨다. 윙계를 한자로 표기할 방법이 없자 '배정'마을 이름을 억지로 끌어다 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이 통로를 공무상 여행했던 조선시대 관리들은 풍각에 있던 '유산역'(幽山驛)과 화원에 있던 '설화역'(舌化驛)서 말을 갈아탔을 것이다.

앞서 본 상심미기와 이 윙계재 사이에 솟은 비슬기맥 상의 689m봉은 일대 최고봉이다. 그 북릉이 지나온 '소매골'과 다음의 '윙계골'을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689m봉엔 이름이 없고, 그 서편에 붙어 선 604m봉이 '갈모봉'이란 이름표를 대신 달고 있었다. 윙계재서 가장 솟아 보이는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윙계재 이후 557m봉(불개산능선 출발점)을 지난 뒤엔 오르기 심히 부담되는 662m봉을 만난다. 그 직전의 537m 잘록이에서 단숨에 130여m나 치솟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법 널찍하고 훤한 쉼터가 기다리는 그 정점서 4분쯤 더 걸으면 676m봉에 닿는다. 남쪽 금천리서 '행개띠빙이', 북편 윙계서 '조리봉'이라 부르는 봉우리다. 이들 662m-676m 쌍봉은 남쪽서 헐티재로 차를 몰 때 정면으로 가장 뚜렷이 솟아 보이는 그것들이다.

조리봉서 내려서면 헐티재다. 지형도 상 높이는 윙계재와 비슷한 510m 정도로 읽히는데 현지 표석에는 530m로 새겨져 있다. 1918년 첫 지형도가 이 재를 '三峰峴'(삼봉현)이라 지칭한 것도 혼란스럽다. 나중에 다시 살피겠지만 진짜 삼봉재는 각북 오산리서 현풍(유가사) 넘어가는 비슬산 주능선 상의 재다. 그런데도 옛 일제 지형도는 헐티재 자리에, 현재의 우리 국가기본도는 비슬기맥 상의 비슬산 최고봉 서편 847m봉에다 그 이름을 적어 놨다.

1918년 지형도에서 하나 더 주목할 대상은, 헐티재 남쪽 길이 현재의 용천사(湧泉寺) 쪽이 아니라 오산리 자연마을 중 하나인 훨씬 아래 '삼천동'마을로 바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헐티재 서쪽 677m봉서 출발해 금천리와 오산리를 구분하며 내려서는 긴 지릉을 타고 길이 나 있었다는 뜻이다.

헐티재를 지나면서 비슬기맥은 드디어 비슬산 권역에 들어선다. 하지만 재에서 그 다음의 677m봉으로는 이어 걸을 수 없다. 지난겨울 철책이 쳐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뒤 기맥 답사자들은 용천사 동편의 '감비골' 쪽으로 내려선 다른 맥을 타고 677m봉에 오른다. 행정당국이 나서서 땅을 사서라도 길을 여는 게 옳겠다.

677m봉은 남쪽서 차를 타고 헐티재로 오를 때 앞서 본 조리봉과 함께 뚜렷이 솟아 보이는 봉우리다. 그만큼 돌출성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그 위 벼랑바위들에서 가창호 최상류 수원지인 북편 '마내미골'이 한 눈에 조망되는 것도 그 덕분이다. 하지만 677m봉에는 고유한 이름이 없었다. 오산리 마을서는 그냥 '감비골산'이라고만 지칭하고 있었다.

677m봉에서 시작된 벼랑바위군은 그것과 20여분 떨어져 있는 다음의 757m봉 지나서까지 계속된다. 문바위 같은 것도 있고 흔들바위 닮은 것도 있다. 헐티재~비슬산(정상) 사이에서 벼랑바위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구간이 여기다.

757m봉은 677m봉에 이어 두 번째로 오르기 숨 가쁘다. 하지만 그 수고는 그 위의 시원한 조망으로 보답된다. 꼭짓점이 통바위로 돼 있어 남쪽 오산리 일대가 훤히 보이는 것이다. 677m봉은 북쪽, 이건 남쪽을 보는 전망대인 셈이다. 헐티재~비슬산(정상) 사이 3대 중요지형 중 둘이 이들이다.

마지막 중요지형은 757m봉과 35분 거리에 있는 867m-886m 쌍봉이다. 외형상 둘은 그냥 펑퍼짐하고 숲에 묻힌 평범한 봉우리로 산길조차 꼭짓점을 피해 지나쳐 버릴 정도다. 그러나 886m봉서는 그 북쪽 마내미골 안으로 파고드는 특이한 산줄기가 출발한다. 100m 하강했다가 마지막 올려 세우는 809m 암봉이 압권이다. 정대마을 사람들은 그걸 '정구지덤'이라 불렀다.

반면 867m봉서는 남쪽으로 지릉이 내려서면서 오산리 계곡을 안채-바깥채 두 공간으로 나눈다. 안채는 비슬산 주능선 밑으로 파고드는 물통골-극락골 등 숨겨진 공간이고, 바깥채는 식당·펜션·모텔 등이 들어서면서 밖으로 드러내어진 '대동골'이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헐티재 이후 여기까지 오는 기맥의 남쪽 기슭으로는 여섯 암자가 세워져 그 이름이 가지골짜기들 이름으로도 채택됐다. '감불암'이 있던 골은 '감비골', '석태암' 골짜기는 '석태골'(용천사~부도 사이), '청룡암' 뒷골은 '청룡골'(부도 있는 골)이 된 것이다. 또 용천사서 출발해 저 석태골·청룡골을 거쳐 오르는 등산로는 예부터 나 있던 '중댕이바램이'라 했다. '바램이'는 산허리로 이어가는 길을 가리키고, 그곳 여러 암자를 오가느라 스님들이 많이 다녀 '중댕이'라는 관형어가 붙었다는 것이다.

물통골 높은 지대에 걸쳐 있는 중댕이바램이 초입에는 '범바위'라는 특이한 암괴가 있으며, 조금 더 오르다 만나는 등산안내 전광판 자리는 옛날 큰 배나무가 서 있어 '배나무등'이라 불렸다고 했다. 더 진행하면 식수까지 나 6~7명이 생활할 수 있는 '지네굴'이 있다고 했다. 슬픈 지네 아내의 전설이 서린 그 바위굴에서는 청년들이 빨갱이를 피해 숨어 지내거나 노름꾼들이 비밀 노름판을 벌였었다는 얘기다.

기맥이 886m봉을 넘어서면 847m구릉에 닿는다. 국가기본도가 '삼봉재'라는 엉뚱한 이름표를 붙여놓은 지형이다. 그 다음의 837m잘록이에 인접해 오래된 산길이 나 있어 오해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잘록이 또한 삼봉재는 아니다. 그 잘록이 이후엔 산줄기가 25분여 간 줄곧 내쳐 올라 비슬산 최고봉에 이른다. 드디어 '번치'라 불려온 그곳 평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로써 몇 달 간에 걸친 비슬기맥 답사를 마칠 때도 다가 온 셈이다. 지난 7월 밑그림으로 봤던 기맥 고저표의 미비점을 보완하고 틀린 걸 바로잡는 것으로 기맥 답사를 끝내야겠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