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째 붓과 인연…서예가 남석 이성조 씨

입력 2010-10-28 10:00:10

"글씨는 인격…선비정신 없으면 서예 아닌 것"

공산예원 2층에 전시된 길이 120m, 168폭의 묘법연화경 병풍 앞에서 남석 이성조 씨가 활짝 웃고 있다.
공산예원 2층에 전시된 길이 120m, 168폭의 묘법연화경 병풍 앞에서 남석 이성조 씨가 활짝 웃고 있다.

막 단풍 빛이 비치기 시작한 능선과 파란 가을하늘이 선명한 청록의 대비로 물든 팔공산 자락 아래 자리한 대구시 동구 중대동 '공산예원'. 이곳에 서단(書壇)의 거목 남석(南石) 이성조(李成祚·73) 씨가 18년째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다.

탁필자생(托筆資生). 올해로 딱 55년째 붓과 인연을 맺은 노(老)서예가의 삶을 대변하는 듯 공산예원 앞 문패처럼 선 바위 조형물에 음각된 이 글을 풀면 '붓에 의탁해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서예란 선비정신을 떠나면 더 이상 서예가 아닌 것이여. 선비정신은 곧 굶어죽어도 현실이나 권력, 금력과 아첨하지 않는 것이지…."

남석은 평소에 서예는 마음의 그림이자 인격의 표현으로 인격(人格)이 서야 서격(書格)도 바로 된다는 걸 글 쓰는 철학으로 삼아왔다. 문하생들에게도 '글은 곧 인격'이라며 서풍(書風)을 강조했다.

그런 그가 지천명 중반을 넘긴 어느 때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서울에서 열린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했을 때 서예계의 부패상을 목격했던 것이다. 11명의 심사위원 중 그가 좌장임에도 후배가 심사위원장이 돼 심사과정에서 파벌과 인맥싸움이 불거졌고 등위를 놓고 금전거래가 오갔던 것이다.

그때 남석의 나이 56세.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였지만 그 길로 밤기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지인에게 자신의 다짐을 편지로 썼다.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하고 모든 활동을 접기로 한다'는 글을 써 지인에게 보냈고 처음 붓을 잡고 공부할 때의 초심을 되새겨봤지."

그 길로 남석은 공산예원으로 들어앉아버렸다. 후배 서예가들은 모두들 한 1, 2년 후에는 다시 활동할 것을 점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성품이 워낙 외향적이었고 활동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를 고민하면서 남석은 그렇게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전주 이씨 가문 조선조 인조 임금의 10대손으로 고교시절 고향인 밀양에서 레슬링 선수로 활동하던 그는 18세 때 청남 오제봉 선생을 은사로 서예에 입문했다. 사실 처음엔 서예에 뜻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스승은 "사람이 되면 글도 된다"며 "먹 갈고 청소하며 종이나 접어라"며 그를 곁에 두었다.

"젊을 때는 선친이 강조하신 선비정신 때문에 고통과 번민도 많았지. 현실에 영합해야 할 때도 있었고 가정에 불성실하기도 했었지."

그런데 어느 날 딸아이가 가훈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밀었다. 한참을 고민한 남석이 쓴 가훈은 '때 낀 짓을 하지 말자'였다. 그리고는 이 한 생각을 붓끝에 매달아 열심히 정진했다.

"35세부터 12년간 열심히 제자를 가르쳤지. 성격상 남에게 지는 꼴은 못 보던 터라 내 살점과 피를 내주듯 가르쳤고 각종 서예전에 입·특선을 시켰지."

현재 각 서예전에 초대작가로 활동하는 그의 문하생만도 50여 명이 넘는다. 그런데 요즘 그를 찾는 제자는 10여 명 안팎에 불과하다. 남석은 이를 두고 자신의 팔자려니 생각했다. 괜스레 섭섭한 마음이 들면 우울증만 생길 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공산예원에 들어앉은 후로 하루도 붓과 책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어. 칠순을 넘긴 나이로 쉬운 일은 아니나 작가적 양심이 있다면 세상사를 언제나 깊이 생각하고 깊이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할 수는 없지. 그저 세상의 바람막이로 버틸 뿐이지."

그는 스스로를 정진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칩거 18년 동안 그가 쓴 작품수만 3천여 점에 이른다. 공산예원 곳곳에 작품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런 정진의 결과는 2007년에 열렸던 고희전에서 빛이 났다. 환갑이 지나면서 시작한 대작불사(大作佛事)가 세상에 드러났던 것. 남석은 3년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불경 6만9천384자를 써내려가 마침내 작품길이 120m에 달하는 168폭의 '묘법연화경 병풍'을 완성,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후 '묘법연화경 병풍'은 일본 불교종단 관계자들과 캄보디아 왕사 등이 보고 감탄을 자아냈고 국내 모 불교종단에서 구입의사를 밝히는 등 대작을 공적으로 보관 또는 전시하는 방법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모두 무산되고 현재는 지난여름에 리모델링한 공산예원 2층에 보관돼 있다.

"나는 이 대작불사를 부처로 봐. 그래서 요즘은 매일 아침 그 앞에서 독경과 예배, 명상에 잠기곤 하지. 그러나 언제든 이를 법보시할 용의도 없진 않아."

최근 남석은 자신의 정진과 더불어 요즘 주 2회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제자들에게 서예교습을 하며 지내고 있다. 그리그 세상과 쌓았던 스스로의 담을 조금씩 낮추려 하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그는 도서화(陶書畵·도자기에 쓴 글씨와 그림) 분야에 뜻을 두고 140여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이 중 잘된 108점을 이달 29일부터 한 달간 공산예원화랑에 전시한다. 개인적으로 34번째 작품전인 '남석 이성조 도서화 소품전'이다. 이를 계기로 남석은 공산예원 전시실을 소품 중심의 화랑으로 무료 대여할 생각도 갖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제자를 키우진 않았지만 이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게 꼭 서예를 배우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는 선별지도를 할 작정이야."

한때 세상을 붓으로 휘저었고 또 세상 꼴이 보기 싫어 칩거를 한 노서예가는 이제 일흔셋의 나이에 다시 세상과의 교류를 조용히 탐색하고 있다.

우문기기자 pody2@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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