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견훤 고창전추 입체영상은 압권"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전날 밤 할아버지로부터 쏟아지는 질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투어가 뭐냐? 신문사가 왜 너희를 데리고 가느냐? 가서 뭐하느냐?"
나도 모르는데 자꾸 대답하라고 하니 미칠 노릇이다. 21일 오전 매일신문사가 주최하는 사이언스 투어를 떠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던 울진 기성초등학교 5학년 윤찬수 군은 내내 투덜댔다.
과학자를 꿈꾸는 찬수 군, 그리고 친구와 형, 동생 35명의 동선을 좇으며 사이언스 투어의 즐거움을 찾아보았다.
과학체험이나 여행을 자주 접하지 못하는 오지초교 아이들을 위해 매일신문사에서 마련한 행사라는 기자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우리는 문경석탄박물관으로 향했다.
도시아이들이라면 연탄이 생소하지만 우리에겐 특별하지 않다. 아직 쓰는 집이 많으니까. 그래도 연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며 얼마나 힘겨운 작업인지 알게 됐다. 갱도로 자리를 옮기는 사이 3학년 동생들이 "우리도 거기 가면 진폐증 걸리는 거 아냐"라고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5학년 형으로서 '쿨'하게 가르쳐줬다. "그러면 여기 오는 사람 다 병 걸리겠다."
인수형(6학년)이 갱도 안에서 기자 아저씨에게 장난을 걸다 헤드록에 걸려 울고 있다. 쌤통이다.
기자 아저씨는 온종일 아이들에게 소감을 묻는다고 정신이 없다. 우리는 공부 안 하고 논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거창한 감상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예의상 너무 신기하고 즐겁다고 해줬다. 애쓰는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모노레일을 타고 찾아간 가은오픈세트장은 제법 볼만 했다. 연개소문 촬영지라고 하는데 친구들과 드라마를 재연하며 재미있게 뛰어놀았다.
아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일정은 가은철도바이크 체험이다. 4명이 조를 짜 페달을 밟으며 앞의 아이들과 경주를 했는데, 우리들 대부분이 아주 만족했다. 바이크에서 내릴 때는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였는데, 기자 아저씨가 우리를 일찍 재우기 위해 택한 마지막 코스라는 말을 들으며 친구들과 밤샘을 결심했다.
문경청소년수련원에 도착해 야식으로 피자를 먹었다. 우리 동네에는 치킨 가게만 한곳 있을 뿐이어서, 피자나 햄버거를 구경하기 힘들다. 어쩌면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먹어본 친구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피자 13판을 화끈하게 먹어치우고 정말 밤을 샜다.
22일 오전 9시 예천 회룡포 전망대로 향했다. 올라가는 길이 '장난'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사이언스 투어가 아니라 극기체험이라는 말이 쏟아졌다. '어제 밤을 새는 것이 아니었는데'라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강을 돌아 나오는 물길이 신기했다. 아이들은 1박2일 촬영지라는 것이 더 맘에 든다고 했다. 6학년 형들은 가는 곳마다 사진 찍는다고 정신없다. 졸업앨범을 따로 제작하지 못하는 처지라 그렇다고 한다.
오늘도 '대박'일정이 있었다. 안동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견학이다. 제대로 된 '사이언스 투어'라는 생각이 든다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왕건과 견훤이 싸웠던 고창전투를 소재로 한 4D 입체영상이 압권이다. 특히 물을 이용해 적을 물리치는 장면에서 터져나온 물세례는 아주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퀴즈! 7층전탑과 봉정사 코너'에서 기자 아저씨와 실력을 겨뤘는데, 비슷하다. 기자 아저씨가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 변호사를 꿈꾸는 상경이 형과 깡패로 통하는 원경이 누나가 놋다리 연주놀이에 정신을 팔고, 국제변호사가 되고 싶은 3학년 아현이와 심슨으로 통하는 우찬이, 미래의 과학자 성민이가 장원급제 놀이에 푹 빠져있다.
소중한 시간이 이번 일정으로 끝났다. 어제 아침에 툴툴거린 게 괜히 미안하다. 무엇보다 할아버지께 나를 귀찮게 했던 질문에 대답해줄 수 있게 돼 기쁘다. 내년에도 많은 친구들이 매일신문사에서 보내주는 사이언스 투어를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울진·박승혁기자 psh@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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