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꿈을 꾼다는 것

입력 2010-10-20 07:59:09

어릴 적 누가 내 꿈을 물으면 나는 주저 없이 인형 공장 사장에게 시집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인형을 그다지 좋아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눈을 반짝이며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물론 인형 공장 사장에게 시집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 노력했던 기억도 통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것은 그냥 지나면 잊어버리는 개꿈이었겠다. 어쩌면 골목길에서 어여쁜 인형을 안고 있는 부잣집 아이를 훔쳐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부잣집 아이가 되는 일 같은 건 그때의 내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아이 품에 안겨 있던 인형에게 내 꿈을 몽땅 투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꿈은 결핍의 다른 얼굴일 것이다. 가난한 소녀는 곧 인형 따윈 잊어버리고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내게 없는 것, 부족한 것,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여섯 식구가 오글오글 붙어 자야 하는 달동네 단칸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하는 것이었다. 공부만이 나를 미운 오리새끼에서 근사한 백조로 변화시켜줄 것이라 믿었다. 누가 내게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묻는다면 "공부로 성을 쌓았으면 만리장성이라도 쌓았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한동안 나는 공부라는 꿈에 몰두했으니까.

그 소녀가 이제 불혹을 넘고 있지만 여전히 공부가 좋다. 다만 그 옛날의 공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목적하는 바를 가지지 않고 공부를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 일을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는 일,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밟아보는 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보는 일, 꽃의 이름을 외우고 나무의 내력을 중얼거리고 들판에 서서 바람의 길을 가늠해보는 일, 저 우주 밖의 일에 대하여 궁금해하는 것,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한 편의 시를 쓰는 일. 따지고 보면 세상에 공부 아닌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남이섬은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이다. 섬을 사서 길을 만들고 숲을 짓고 길을 따라 메타세쿼이아를 심었던 사람을 벤치마킹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꿈을 꾸기 때문이다. 산을 사서 나무를 심고 작은 길을 내고 아름다운 숲을 만드는 꿈, 그 자락에 가장 환경친화적인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활공동체라는 지붕을 이어 함께 사는 꿈, 우리 아이의 아이들을 자연과 함께 키우는 꿈, 나는 내 꿈이 공부라는 행위를 거쳐 비로소 삶을 이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부족했던 것, 내 안에 채워지지 않아 갈망했던 것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 우리 모두의 삶을 보다 더 풍성하게 채울 수 있는 것으로 꿈의 눈을 넓힌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아직도 여전히 꿈을 꾼다. 살아있으므로.

원태경<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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