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냄비 속 낙지와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을까
어느 시인이 인도 여행길에 올랐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나를 찾기엔 인도가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왕 나선 김에 인도 내의 행선지를 색다른 시도로 결정하기로 했다. 닳아빠진 인도 지도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은 채 세 바퀴를 돌린 다음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찍었다.
마음 속 도박을 하면서도 손가락 끝에 찍힌 그곳이 비행기가 내리는 기착지에서 가까웠으면 하고 은근하게 바랐지만 빗나가고 말았다. 그곳은 동인도 캘커타에서 아주 먼 인도 대륙을 동에서 서로 한 바퀴 횡단해야 하는 정말 머나 먼 곳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자기와의 약속을 깨느니 여행을 취소하는 게 나았다.
8일 걸려 도착한 곳에 아무것도 볼 게 없어
그곳은 인도 서부와 파키스탄 국경 근처에 있는 사막 귀퉁이의 작은 마을 쿠리라는 곳이었다. 도상 거리는 기차로 쉬지 않고 달리면 40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시인은 인도의 시간 개념을 최대한으로 감안하여 70시간으로 예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예상 또한 빗나가고 말았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길 떠난 희랍의 알렉산더 대왕처럼 대륙을 가로 질러 달리고 또 달렸다. 일곱 번 기차를 갈아타면서 4일은 기차역에서 잤고 3일은 기차 칸에서 배낭을 베고 새우잠을 잤다. 걸린 시간은 8일 반나절이 걸렸다. 어렵게 도착한 쿠리 마을은 아무것도 볼 게 없었다. 아무 것도 정말 아무것도 볼 것 없는 그걸 보려고 먼지와 냄새를 뒤집어 써가며 그렇게 달린 것이다.
지도 펴 놓고 손가락으로 찍어 장소 결정
'심심하다'는 생각이 깊어지면 더러는 살기가 싫어질 때도 있다. 백수의 하루가 그렇게 고달픈 것이다. 고속도로 지도를 펼쳐놓고 내 스스로 코끼리 코를 늘어뜨려 서너 바퀴를 돈 다음 손가락으로 찍어 보았다. 전라도 무안 함평 근처 함평만이란 바다가 찍혔다. 인도를 찾아간 시인처럼 나의 행선지는 함평만을 물고 있는 어느 포구쯤 되리라 생각했다.
은퇴 친구들 등산모임인 천산대학의 다음 행선지를 무안 쪽으로 정하고 1박 2일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일단 무안 버스정류장 뒤편에 있는 시장에 들러 뻘낙지 몇 마리를 사 스티로폼 상자에 챙겨 넣었다. 우리들의 밤을 즐겁게 해줄 귀한 친구들이다. 무조건 해안도로를 타고 달렸다. 마음에 드는 하룻밤 머물 곳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혼기를 놓친 처녀총각처럼 약간은 허탈한 마음 앞에 '도리포 가는 길'이라는 화살표 팻말이 언뜻 눈에 띄었다.
"우회전해봐, 도리포로 들어가 보자." 예상은 적중했다. '도리'라는 마을 이름은 내 고향이자 본적지인 경산시 하양읍 도리(島里)와 똑같았다. '고향은 어떤 경우에도 배반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믿음이 이날처럼 적중되기는 처음이었다. 도리포는 일출과 일몰의 풍경을 제자리에 앉아서 볼 수 있는 동시상연의 정말 멋진 포구였다. 시인이 찾아간 쿠리라는 마을은 아무것도 볼 것 없는 볼 것이 있었지만 이곳 도리포는 너무 많은 볼 것들의 볼 것 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곶 끝 식당서 낙지로 주린 배 채워
식당은 뭍의 발기가 성낸 얼굴로 바다 깊은 곳으로 삽입되어 있는 곶(串) 끝에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배고파 죽겠다"는 친구들과 일단 연포탕 전문집으로 들어가 주린 배를 애무하듯 낙지로 채워 넣었다. 냄비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산 낙지의 운명을 유리뚜껑으로 들여다보고 있으니 '삶도 낙지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고향 아닌 고향 같은 도리포의 바닷가 숙소인 '바다 진흙 체험장'은 하나님의 은총과 같은 석양의 놀라운 풍경을 끌어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 고흐의 초기 작품에 나옴직한 어두운 화면 속에 바다는 그렇게 누워 있었다. 우리 천산대 학생들은 갯가에서 마신 술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노래를 불렀다. "푸른 밤하늘에 달빛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한 것…"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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