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전 대구에서 발생한 10월항쟁 당시 생생한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 처음 공개됐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서 발굴한 이 사진들은 대구10월항쟁유족회 측이 입수해 10월항쟁 64주년을 맞아 추모제를 열며 일반에 첫 공개된 것이다.
대구 10월항쟁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 1일부터 이틀간 굶주리던 시민 수천 명이 쌀을 달라고 요구하며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봉기한 유혈사건이다. 1일 오전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과 대구공회당(현재 시민회관) 인근에 집결, 경찰 100명과 대치했다. 부녀자와 어린이 등 시민 1천여 명도 대구부청(현재 시의회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격렬한 대치 속에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일 오전 시위대는 1만 여명으로 불어났다. 미군정의 명령을 받고 강제해산에 나선 경찰은 대구역 인근 투쟁본부 앞에서 발포, 이 과정에 민간인 17명(또는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 일부 군중들은 지서와 파출소를 공격했다. 관리·부호의 집을 공격해 몰수한 식량과 재산을 빈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미군정의 계엄령 선포로 시위는 진정국면에 들어갔지만 이후 칠곡, 고령, 성주, 영천, 영일 등 19개 군으로 확산됐으며 전국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지난 3월 '대구10월사건 관련 진실규명 결정서' 발간을 계기로 명예회복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결정서에 따르면 '10월항쟁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와 지자체에 '위령·추모사업 지원 방안 마련' 등 4개 권고사항을 촉구하기도 했다.
대구10월항쟁 유족회 이상번 사무국장은 " 이 사진들은 역사의 부침 속에 지난 60여 년간 쉬쉬해온 10월항쟁을 증언하는 결정적 증거물로 언론 지면에는 처음 공개된다" 라고 말했다. 이 사무국장은 " 지속적인 진실규명을 통해 10월항쟁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유족 배·보상문제도 꾸준히 제기할 방침" 이라고 말했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50여년간 '10월폭동'으로 불려져 왔다. 2000년대 들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되면서 '10월사건'으로 개명됐다. 본지에서는 사진자료를 제공한 유족회 측의 요구에 따라 '10월항쟁'으로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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