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는 '노인의 날'이었다. 인륜지사(人倫之事)인 경로(敬老)에 따로 날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이날 하루만큼은 노인은 노인대로,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노인이 대접받는 건강한 사회를 함께 반추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흔히 노인들은 나이가 들어가면 나이 많이 든 것을 감추고 싶어한다.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드러내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일종의 자기방어 심리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노익장(老益壯)이란 말도 그런 맥락이다.
늙어서도 기운이 더욱 넘친다는 의미의 '노익장'이란 말은 본디 노당익장(老當益壯)이란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나라 말기 마원이란 자가 나이 들어 대장군이 됐을 때 반란군을 진압하러 출정하려고 하자 광무제가 '그대의 나이는 이미 너무 늙었다'며 만류했다. 이에 마원이 '신의 나이 비록 예순둘이지만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을 탈 수 있으니 늙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며 진군하자 황제가 '이 노인장이야말로 노당익장이로군!'이라고 치하한 데서 나왔다. 황제는 예순둘을 전쟁터에도 갈 수 없는 나이라 보았고 마 장군은 아직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도 탈수 있는 장년이라고 자부한 셈이다.
요즘 나이 예순둘이면 어느 누구도 광무제처럼 노인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만큼 기대수명이 높아졌다는 얘긴데, 그렇다고 철갑옷 걸치고 말 타고 전선을 누빌 만큼 강인한 예순둘이 많을 것이냐는 것도 솔직히 의문이다. 요즘 예비군에서 민방위로 넘어가는 나이(33세)를 감안해도 마원 장군 시절 노(老)와 장(壯)의 경계를 60대 초반 정도로 본 건 공연한 호기가 아니다. 문제는 그분들을 공경하고 받들어야 하는 젊은 세대의 상대적 인식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경로 의식이 세월이 갈수록 옅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우스개지만 지하철 경로석에 앉아 눈 감고 있는 여학생에게 '여긴 경로석이야'라며 자리를 비키라고 하자 '저도 돈 내고 탔는데 왜 그러세요?'라고 실룩댔다. 그러자 어른 왈 '이 자리는 돈 안 내고 타는 사람이 앉는 자리야!' 이런 풍속도가 요즘 일부 젊은 아이들 경로 의식의 단면이다. 젊은 세대에 그런 의식이 번질수록 어른 세대는 세상 변한 탓만 하고 한숨 쉬며 홀대당할 게 아니라 당당히 올바르게 가르쳐가며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어갈 책임이 있다.
노익장의 고사(故事)뿐만 아니라 노마지지(老馬之智) 같은 바른 지혜로 가르쳐야 한다. 대접받고 군림하자는 게 아니라 젊은 후세들에게 온고지신의 바른 경로 교육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노마지지는 제나라 재상 관중(管仲)이 산악 국가에 정벌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이럴 때는 늙은 말의 지혜가 필요하다'며 늙은 말을 풀어놓은 뒤 뒤를 따라가 무사히 돌아온 데서 유래한 말이다. 훗날 한비자는 '관중 같은 지혜 있는 자도 모르는 일이 있으면 주저 않고 늙은 말에게까지 지혜를 배우려 하는데 지금 사람들은 노인과 성인의 지혜를 배우려 들지도 않으니 참으로 잘못된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 젊은 세대가 노인의 날에 새겨야 할 것은 양로원 방문 같은 봉사도 좋지만 그런 '노마지지'의 정신을 겸허히 배우려 드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노년 세대 또한 공경받고자 하면 노인의 날 밥상 대접이나 받는 일회성 공경이 아니라 노인의 존재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수범(垂範)의 본보기 교육이 중요하다. 요즘 아이들이 '노마지지'니 '노고추'(낡고 닳은 송곳이 구멍을 더 잘 뚫는다) 같은 노년 세대 존중 이유를 스스로 배우고 알아내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 따라서 노인의 날은 젊은 세대가 노인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기대하는 날이 아니라 노인 세대가 공경받기 위해 어떤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기념일이 되는 게 옳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후세를 바른길로 이끌고 가르쳐야 하는 것은 결국 노년 세대의 몫이니까….
노인의 날을 보내며 노익장 세대 모든 분들이 갑옷 입고 말 탈 수 있는 건강을 누리시길 기원 드린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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