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감(枾)은 호환, 마마 보다 더 무서운(?) 존재였다. '호랑이다'라고 아무리 겁을 줘도 울음을 그치지 않던 아이가 '곶감이다'는 말에 울음을 뚝 그쳤다. 소를 잡아먹기 위해 민가로 내려 왔던 도둑 호랑이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감이 무서워 36계 줄행랑을 쳤다. 많이 알려진 구전동화지만 호랑이도 무서워하지 않던 갓난아기가 감이야기에 울음을 그쳤으니 감의 위세가 대단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감이 와인으로 변신해 와인 애호가들의 사랑마저 독차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감의 고장 청도를 찾아 감와인 만들기에 나섰다. 팔조령 고개를 넘어 청도로 들어서자 역시나 '감 천국'이었다. 감 천국 속을 뚫고 들어선 곳은 풍각면 풍각논공단지에 위치한 청도감와인㈜ 공장. 공장입구에서부터 풍겨져 나오는 달콤한 감 내음에 기분이 좋아진다.
감와인을 만들기에 앞서 하상오 청도감와인㈜ 대표로부터 제조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생각보다 과정이 복잡했다. 제조 공정은 감 선별 및 파쇄 작업과 발효 과정 그리고 숙성, 여과, 블렌딩, 입병 과정으로 분리할 수 있다. 특히 발효, 숙성, 여과 과정은 4년 이상 수 차례나 반복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다. 감와인의 종류에 따라 방법과 사용하는 과정이 천차만별이어서 이내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를 만들어 볼까 고민하다 감와인중 최고급으로 평가받는 아이스 감와인 만들기에 나섰다. 일반 감와인과 달리 아이스 감와인은 나뭇가지에서 초겨울까지 홍시가 된 감만을 주 원료로 해 영하 20℃에서 2년간 얼리고 특별한 효모를 사용해 정제·숙성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만큼 품도 더 들어가고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다.
먼저 손을 깨끗이 소독하고 복장을 갖춰 입었다. 손은 물론이고 술 담그는데 사용하는 그릇 등 모든 재료들은 알코올로 깨끗하게 소독해야 한다. 특히 와인은 발효 과정에서 세균이 번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소독에 신경써야 한다.
소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와인 만들기에 돌입했다. 2년 동안 냉동한 상태의 감들을 가득 쌓아 놓은 공장 내부로 들어갔다. 이미 2년전 선별작업을 거친 감들이라 별도의 선별없이 곧바로 파쇄 작업을 시작했다. 냉동된 상태의 감들이 녹으면서 발효가 잘 될 수 있게 잘게 으깨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홍시라지만 영하 20도 상태에서 얼린 감이라 마치 돌을 다루는 것 같았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얼음 홍시를 으깨는 손이 마비가 될 정도로 감각이 없어졌다. "보통은 기계로 파쇄 작업을 하지만 현장감 있는 기자 체험을 위해 특별히 수작업을 준비했다"는 하 대표의 배려가 고맙기 보다는 살짝 원망스러워진다.
다행히 파쇄 작업중 떨어져 나간 얼음 상태의 감즙을 간간이 맛볼 수 있어 입은 즐거웠다. 감즙은 아이스 와인 제조 과정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중 별미였다. 일반 감보다 당도가 3배 정도 높아 감 특유의 달콤한 맛과 향이 작업시간 내내 입안을 떠나지 않았다. 잘게 으깬 감들을 별도의 용기에 넣는 것으로 파쇄 작업은 끝이 났다.
이렇게 으깬 감을 저장 탱크에 담아 최소 2, 3년간 발효와 정제 과정을 수 차례 거쳐야 최고급 와인으로 탄생한다. 제대로 된 발효를 위해서는 이 기간 동안 온도를 15도 정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포도와 사과에 비해 향이 떨어지는 감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 저온 발효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접 만든 와인을 빨리 맛보고 싶은 욕심에 '속성으로 숙성하는 방법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와인의 맛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 그 정도의 기간은 최소한으로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술과 사람은 익어야 제 맛 아닌가. 발효기간 동안에는 정제와 블렌딩 과정도 병행한다. 저장 탱크마다 발효 속도와 이에 따른 알코올 도수가 달라 이를 평균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다음은 와인 판별 작업. 작업장에서는 40t 용량의 저장 탱크 10개와 10t짜리 탱크 30개, 2t짜리 100여 개의 저장탱크에서 와인을 발효, 숙성시키고 있다. 와인병으로 따지면 80만 병을 저장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와인 판별작업은 이들 탱크에서 감와인이 적당히 숙성됐는지를 확인하고 출고를 결정하는 작업이다.
저장 탱크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와인의 맛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저장탱크 입구에 툭 튀어나온 밸브를 열자 압력 탓인지 와인이 폭포수처럼 '쏴~'하고 쏟아진다. 투명한 컵에 담긴 선명한 황금 빛깔에 끌려 나도 모르게 한 모금 들이키고 말았다. 빛깔과 향 그리고 맛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합격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데도 그만 술자리에서의 버릇이 나와 버린 것. 함께 판별작업을 하던 하 대표가 "괜찮다"며 다시 한 잔 가득 따라준다.
합격여부는 빛깔과 향, 맛으로 판단한다. 빛깔은 황금색이어야 하고 맛이 쓰지 않아야 한다. 특히 코를 자극하는 감 특유의 향이 진하게 묻어나야만 합격 판정을 받을 수 있다. 이 과정은 사람의 미각과 후각, 시각을 총동원해 판단하는 과정이라 세심한 주의와 노하우가 필요하다. 판별을 핑계삼아 와인을 실컷 마실 수 있어 좋았지만 몇 번 시도하지 않아 벌써 취기가 오른다.
마지막으로 탱크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와인을 투명한 통에 담는 작업만 남았다. 둥근 원판처럼 생긴 와인 소독기를 거쳐 나온 와인병에 와인이 채워지고 곧바로 코르크 마개가 씌워진다. 이 작업 역시 파쇄 작업과 마찬가지로 기계가 자동으로 해주지만 코르크 마개를 끼울 때는 사람이 직접 수작업으로 해야 한다. 코르크의 상태는 와인의 부패나 오염에 적잖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병에 라벨을 붙이면 4년 동안의 노력과 정성이 한 병의 와인으로 화려하게 탄생한다.
와인만들기가 끝났지만 당장 맛볼 수 없다는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공장내 감나무 아래에서 이미 만들어진 와인을 직원들과 함께 나눠 마셨다. 누렇게 익어가는 감나무 아래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와인을 마시다 보니 무릉감(?)원이 따로 없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사진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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