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억새꽃 물결'푸른 하늘 '환상의 짝궁'
태양계를 도는 지구별이 궤도를 살짝 기울였다. 온도계 눈금이 부쩍 제 키를 낮추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무더위도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고 절기를 따라 온 선선한 바람은 셔츠 깃을 밀어 올린다.
10월 문턱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가을이 부쩍 아는 체를 한다.
바뀐 계절을 찾아 나선 길, 행선지는 어디가 좋을까.
단풍은 이르고 들녘 이삭은 아직 제 빛깔을 찾지 못했다. 이럴 때 '가을의 전령' 억새를 찾아 나서면 어떨까.
이제 막 흰꽃을 피워낸 억새가 군무(群舞)를 펼치기 시작하는 가을산의 낭만 속으로 들어가 보자.
태백 구봉산에서 발원한 낙동정맥이 끝자락을 이루는 천성산(922m)은 가지-운문산, 신불-간월산, 능동-재약산과 함께 영남알프스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원효암, 내원사, 홍룡사 같은 명찰들의 가호(加護)를 받고 내원사-성불암계곡 같은 이름난 계곡을 깃들여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렸다.
천성산은 원효대사와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다. 원효는 해탈 위주의 참선과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를 배척하고 스스로 저잣거리로 내려와 포교의 씨를 뿌린 대중불교의 선각자였다.
대사의 화엄사상은 당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신라에는 당에서 온 학승(學僧)들이 북적거렸다. 전설에 의하면 중국에서 건너온 학승들을 지도하기 위해 대사는 50여 곳의 암자에 스님들을 분산시키고 산 정상 화엄벌에서 설법을 펼쳤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1천 명의 스님들을 모두 성인(聖人)으로 교화시킬 수 있었고 '천성산'(千聖山)이란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 초가을 억새의 낭만 속으로 초대
억새 산행은 두 시즌으로 나뉜다. 갈색으로 탈색된 억새들이 황금물결로 일렁이는 늦가을 정취를 시즌 2라고 한다면, 초록 줄기에서 솜털 같은 꽃을 막 피워내는 초가을 정취는 시즌 1으로 부를 만하다.
밀어(蜜語)와 낭만을 찾는 연인들의 데이트 길이라면 늦가을 억새가 제격이고, 가족들과 친구들과 산행 길이라면 지금이 제철이다. 시원한 녹색 파스텔톤 위로 펼쳐진 은빛 물결, 그 위로 높게 걸린 푸른 하늘이 환상의 조합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억새꽃이 막 영남알프스에 안착했다는 화신(花信)을 접하고 일행은 천성산으로 향했다. 출발점은 공룡능선 문턱인 내원사 입구. 급경사에 변덕스런 등락(騰落)으로 산꾼들 사이에선 이미 악명이 높은 코스다.
등산로 초입부터 로프와 암릉이 등산객을 압도한다. 보통 공룡능선은 거친 암릉과 스릴을 기본으로 하고 대신 조망으로 이 노역을 보상해주는 것이 콘셉트다. 그러나 여기 공룡은 롤러코스터를 태우듯 진만 빼놓고 조망에는 무척 인색하다. 산꾼들은 수고만 있고 보상이 없는 이 코스를 공룡(恐龍)보다 '공룡'(空龍)이 제격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두 시간쯤 걸어 일행은 중간 정류소 격인 집북재에 도착했다. 집북재는 내원사와 주남리를 잇는 산길 교통의 요지다. 원효대사가 스님들을 모을 때 정중앙인 이곳에서 북(鼓)으로 강의 시작을 알렸다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빽빽한 송림 사이로 설법을 듣기 위해 산으로 오르는 학승들의 행렬이 오버랩 된다.
# 영남알프스의 산군들 한눈에
집북재에서 마지막으로 급경사를 가쁜 숨으로 오르면 천성산2봉(비로봉, 812m)이다. 군사시설이 들어선 정상을 대신해 실질적인 정상 역할을 하고 있다. 오후의 햇살을 흠뻑 받은 정상이 모처럼 사방을 펼쳐 보인다. 좌우로 영남알프스의 산군들이 산너울을 이루며 도열해 있다. 27산, 10봉, 3령(嶺)이 펼쳐 놓은 웅장한 자태에 압도되어 감탄사만 연발한다.
정상에서 간단히 오찬을 끝내고 화엄벌을 향해 오른다. 지척에 정상이 있지만 등산객들은 군사시설로 묶인 천성산 대신 억새 향연이 펼쳐지는 화엄벌로 진로를 잡는다.
철조망 옆을 위태롭게 지나 화엄벌에 이른다. 이 화엄벌은 생태계의 타임캡슐이라고 부를 정도로 환경의 보고이다. 이 늪에는 앵초, 끈끈이주걱, 잠자리난초 같은 희귀식물과 까치살모사, 북방산개구리 같은 천연기념물도 서식하고 있다. 100일 단식으로 유명한 지율 스님의 금식투쟁도 이 늪의 도롱뇽들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서녘으로 기우는 해를 따라 가노라니 어느새 화엄벌의 한복판에 이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술들이 튕겨내는 은빛 광선이 시야를 간질이고, 억새 숲에서 연인들이 쏟아내는 함박웃음은 가을 하늘에 맑게 투영된다.
# 억새 속에선 우리도 한 점 풍경
억새 앞에 그동안 모든 수고를 내려놓고 자연과 눈을 맞춘다. 바람처럼 억새처럼 우리도 어느새 한 점 풍경이 된다.
벌판을 울리는 큰 외침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다. 희미한 능선 위로 화엄(華嚴)을 일갈하는 원효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진다. 설법에 몰입된 학승들의 눈빛도 억새물결을 따라 반짝인다. 이 화엄벌이야 말로 원효의 대중포교의 광장이자 화엄사상의 외방(外邦)선교의 현장이 아니겠는가.
다시 커피 한잔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홍룡사 길로 내려선다. 홍룡사는 절 바로 뒤 폭포에 살던 용이 무지개를 타고 올라갔다는 전설에서 절 이름이 유래되었다. 본래 이름은 '무지개에 젖은 절집'이라는 뜻의 '홍롱사'(虹瀧寺)였다. 이런 멋진 이름이 사장(死藏)된 것은 멋, 서정 대신 실용(발음의 편의상)과 기복을 염원한 후대 사람들의 선택 때문이었다. 신도와 일반인들의 선택에 불만인 듯 절에서는 아직도 '홍롱'이라는 이름을 고집하고 있다.
우주의 진리 세계를 말한다는 화엄의 산실에서 이런 갈등이 어색하기만 하다. 산 위에서는 개발과 보존이 갈등을 빚고, 산 밑에서는 실용과 멋이 다투니 대사가 살아오면 뭐라고 꾸짖을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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