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낙엽처럼 시들 것 같던 사랑, 낙엽길 걸다보면 생기 되찾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후텁지근하던 공기가 어느새 긴팔 옷이 반가울 정도가 됐다. 이제 곧 낙엽이 떨어지고 찬 가을바람에 가슴이 시리겠다. 가을만 되면 왜 이리 가슴이 아릴까.
어느 조사에 따르면 성인 남성 절반이 가을을 탄다고 한다. 잡지 못한 옛 사랑도 생각이 나고, 허한 마음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고, 하늘만 멍하니 보는 가을 증후군. 시인 정현종은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우리는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가을, 원수같은'('가을, 원수같은')이라고 노래했다.
가을은 인생으로 치면 중년쯤 될 것이다. 바짝 마른 낙엽만 봐도 왠지 내 처지 같은 느낌에 처량함과 상실감이 들고, 다시는 나의 여름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중년남들이 더욱 가을을 타는 것은 아닐까.
일본 미키 사토시 감독의 영화 '텐텐'(2008년·사진)에서 중년남 후쿠하라(미우라 토모카즈)는 실수로 아내를 죽이고 만다. 너무나 애틋했던 사랑이 어느 날 마른 낙엽처럼 시들어버린 것을 알게 되고, 아내 또한 이러한 건조한 일상이 힘들다.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 누가 먼저 내려버리면 어쩌지? 영화는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이 남자가 경찰서로 자수하러 가기 전 아내와의 추억의 장소들을 사흘간 찾아다니는 도심 여행을 그리고 있다. 아내와 첫 키스를 한 신사, 둘이 즐겨 찾던 변두리 식당 등을 찾아 그 추억들을 곱씹는 여행이다.
'텐텐'은 여러 곳을 배회하는 뜻의 '전전'(轉轉)의 일본식 발음이다. 사채 청부업자로 살아가는 후쿠하라는 동행을 찾는다. 어려서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외롭게 살아가는 대학생 후미야(오다기리 조)다. 그에게 83만엔의 빚을 받아야 하는 그는 오히려 100만엔을 줄 테니 도쿄를 같이 산책하자고 제안한다.
둘은 가을빛이 깊어가는 도쿄 도심을 배회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마침내 둘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훈훈한 관계로 이어진다. 은행잎이 노란 융단처럼 펼쳐진 길을 걸어가면서 티격태격 이어지는 둘의 대화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유가 묻어난다. 즐겁거나 슬프거나 힘들 때 함께해야 할 그 존재의 이유들이다.
'텐텐'은 멀리 떠나는 가을 여행이 아니라 그저 도심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리고 돌아다니는 여행이다. 천천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아주 사소한 기쁨들을 발견하게 해준다.
사실 가을은 추억의 여행이고, 추억이라면 도심이 가장 많지 않을까. 영화관, 공연장, 시장, 라면집, 옷가게, 그리고 작은 공원의 벤치 등 걷다 보면 도심에는 나의 많은 흔적들이 담겨 있다. 첫 사랑과 처음 걸었던 길도 대부분 이 같은 골목이었을 것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 길도 좋지만 올해 가을은 도심 여행을 떠나고 싶다. 어쩌면 잊고 있던 가장 가슴 시린 순간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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