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경북을 걷다] (39)의성 금성산∼비봉산길

입력 2010-09-29 07:50:24

아기자기한 기암괴석·고갯길, 힘들면 언제든 산아래로…

박종경 작-금성산에서 금성산과 비봉산 줄기에 올라서면 인근 마을과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굽어본다는 것은 산을 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잠시나마 무언가 이뤄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산하를 내려다보는 우월감에 빠져본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잠시 발길을 내려디디면 자신도 저 아래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며 겸손을 배우게 된다. 박종경 화백은
박종경 작-금성산에서 금성산과 비봉산 줄기에 올라서면 인근 마을과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굽어본다는 것은 산을 오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잠시나마 무언가 이뤄냈다는 성취감과 함께 산하를 내려다보는 우월감에 빠져본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 잠시 발길을 내려디디면 자신도 저 아래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되고, 스스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지를 인식하며 겸손을 배우게 된다. 박종경 화백은 "금성산과 비봉산은 외로이 우뚝 솟은 덕분에 조금만 올라서도 주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경치를 자랑한다"고 했다. 전망만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밋밋한 산길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기암괴석과 고갯길이 즐비하다. 가끔 만나는 옹달샘도 말할 수 없이 시원하다.

의성 금성산을 올랐다고 했더니 한 지인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럼 그 산에는 묘를 못 쓴다는 전설도 들었겠네?" 위성사진을 보면 의성땅에서 유난히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산자락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금성면에 있는 금성산(530.1m)이다. 동북쪽으로 훨씬 높은 비봉산(671.8m)과 산줄기를 나누고 있지만 이 땅에 발을 내디디면 눈앞에 성큼 다가서는 지세는 단연 금성산이다.

중앙고속도로 의성나들목에서 내려선 뒤 5번 국도를 따라 의성읍 쪽으로 잠시 가다가 오른편 927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금성면에 닿을 수 있다. 동행한 박종경 화백과 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이런 대화를 나눴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참 묘하다. 너른 들판 한가운데 마치 깎아지르는 절벽이라도 솟은 듯이 산이 자리 잡았다." 마치 주변의 얕은 산과 들판을 굽어보며 군기반장이라도 하는 형세다. 그런 느낌은 비단 낯선 여행객의 서투른 감성만은 아닌 듯 싶다. 금성산은 예로부터 물과 불을 관장하는 산으로 신성시돼 왔다.

앞서 묘를 못 쓴다는 전설도 여기서 비롯한다. 기록을 찾아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으로 나와있다. 7천만 년 전인 중생대 백악기에 화산이 폭발한 뒤 불기운이 꺼져버렸다는 것. 옛 사람들이 사화산임을 알았을 리는 없을 터. 하지만 산자락 아래 산운마을의 수맥과 산 정상부의 화구가 서로 통한다는 이야기가 '경상북도 이야기 여행' 중 '의성 금성산과 산운마을' 편에 실려 있다.

작가가 전설을 토대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이지만 얼추 맥은 맞아보인다. 경북도가 펴낸 '산과 숲, 나무에 얽힌 고향 이야기'에도 비슷한 전설이 담겨 있다. 풍수지리상 명당 중에 명당인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하고 큰 부자가 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몰래 묘를 쓰는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석 달 이상 비가 오지 않고(다른 자료에는 '3년 이상 가뭄이 계속된다'고 나와 있다) 산자락에 있는 수정사 우물까지 말라버렸다는 것. 이럴 때면 산 주위 마을 사람들이 숨은 묘 찾기에 나서고, 간혹 묘가 발견되면 산 아래로 시신을 굴려내린 일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남몰래 땅을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고 하는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산길을 내닿기 전에 옛 소왕국인 조문국(召文國)을 빠뜨릴 수 없다. 산봉우리에서 동쪽으로 2㎞가량 떨어진 곳에 '조문국 경덕왕릉'이 있다. 옛 의성땅에서 약 400년간 존속했다고 알려진 조문국.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은 미비하다. 조문국에 얽힌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벌휴왕 2년(185)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를 좌우 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벌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도읍지로 알려진 금성면 대리리 일대에 규모가 큰 100여 기를 비롯해 모두 260여 기의 고분군(古墳群)이 남아있는 점으로 미뤄 삼한의 초기부터 존재하던 강성한 부족국가라 추정된다. 옛 왕국의 실체는 아직 베일을 모두 벗지 못한 상태다.

의성군이 경북도 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금성 고분군 조사작업을 펼치고 있다. 최근엔 경북도 기념물 제128호인 금성고분군 중 대리리 2호분이 5세기경 지배층 무덤인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앞서 삼국사기 기록에서 '조문국을 벌했다'는 표현이 복속시킨 것인지, 단지 침공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고분군 조사작업이 마무리되면 잊혀진 옛 왕국의 수많은 비밀들이 밝혀질 터이다.

금성산 자락에는 영천 이씨 집성촌인 산운마을이 있다. 금성산과 구름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전통 가옥 40여 채가 남아 있으며, 고택 사이의 돌담길도 산책하기에 좋다. 마을 입구에 의성군이 폐교를 리모델링해 만든 '산운생태공원'도 가족 나들이 코스로 그만이다. 금성산 산길은 여느 산에서 찾아보기 힘든 장점을 지녔다. 금성산 줄기에서 비봉산 줄기로 옮겨타는 곳곳에 갈림길이 있어서 힘에 부친다 싶으면 산아래로 쉽게 내려와 출발점으로 돌아올 수 있고, 5시간30분이 걸리는 완주 코스를 따라 산행을 해도 다시 출발점에 돌아올 수 있다. 아마도 주변 산줄기와 이어지지 않고 들판 한가운데 오롯이 솟아있기 때문이리라.

주차장 왼편에 금성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중턱까지 채 못 가서 금성산성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석축 길이만 2.7㎞에 달했다고 한다. 산정상부 근처에는 '병마 수련지'도 있다. 조문국 최후의 패전장이라는 기록이 '의성현지'에 남아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신라 장병 2천 명에 맞서 조문국 병사들이 마지막 항전을 펼쳤다고 한다. 산성에 진을 치고 맞서 싸우니 신라군도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조문국 왕은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시위하기 위해 산에 볏짚을 쌓아 곡물을 저장한 듯 보였고, 백토를 물에 타서 흘려보내 마치 쌀뜨물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왕과 병사들은 끝내 산성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서쪽에 우뚝 솟은 금성산과 동북쪽에 가부좌를 튼 비봉산 사이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양쪽으로 거대한 암벽이 눈에 띈다. 비봉산 기슭에 큰 바위 2개가 10m가량 떨어져 자리 잡고 있는데, '아들바위와 딸바위'라고 전해진다. 부녀자들이 물을 긷고 지나면서 왼손으로 돌을 던져, 바위 중간쯤에 있는 구멍에 넣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두 산자락을 양옆에 끼고 산길을 따라 오르면 1천300여 년 전인 신라 신문왕 때 의상조사가 창건했다는 수정사를 만날 수 있다. 아담한 절 뒤편에 범종각이 있고, 그 옆으로 자그마한 산길이 나 있다.

능선길로 가장 빨리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다. 산자락에도 33℃를 웃도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숲길로 접어드니 선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계곡에 물이 말라 안타까워했더니 길 안내를 맡은 의성군청 김철규 씨가 "돌 아래로 여전히 물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른 계곡 한가운데 마치 커다란 옹달샘처럼 물이 솟고 있었다. 능선에 오르자 비봉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마을들은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능선길도 제법 가파르지만 힘겨울 만하면 내려서는 덕분에 그다지 숨이 가쁘지는 않다. 비봉산 남쪽 전망능선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가히 절경이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산바람을 맞는다. 그 청량감에 빠져 내려오기 싫어졌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의성군청 공보담당 김철규 054)830-6533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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