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순국 100년] <6>안동인들의 국내 항일투쟁

입력 2010-09-28 10:59:17

유공자 310명·순국자 10명…전국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의 聖地'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 연구단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 연구단
풍서농민회
풍서농민회

안동인들은 우리나라 최초 의병운동부터 광복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줄곧 한국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전국 각 시·군의 평균 독립유공자는 30여 명인데 안동은 그보다 10배나 많은 310여 명이나 된다. 지금도 확인 중인 미포상(未褒賞) 독립운동가가 700여 명에 달해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동 사람이 1천 명을 훌쩍 넘는다.

안동은 또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를 배출했다. 외세의 침탈과 경술년 국권 상실로 전국에서 70명이 목숨을 끊었는데 이 가운데 10명이 안동 사람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절개와 의리로 항일투쟁의 정신적 사표(師表)가 된 것이다.

안동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종가가 훼손되는 고통 속에서 진행된 의병, 기득권을 포기하고 떠난 만주 독립운동, 소작인들을 위해 지주들이 앞장선 풍산소작인회 활동 등 하나같이 가지고 배운 자들이 역사적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한 '충'과 '의', 유교적 삶을 살아오던 선비들의 '애국충절'이 서려 있다.

◆51년 한국독립운동사 빈틈없이 메운 안동독립운동

안동은 1894년 갑오개혁을 시작으로 1945년 8·15광복까지 외세의 침탈과 일제의 강점에서 주권을 지키고 나라를 되찾으려 했던 '한국독립운동사 51년'을 빈틈없이 메운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부분 지역의 독립운동이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 소수 군자금 모금에 그쳤다. 하지만 안동인들은 1894년 최초의 의병운동인 갑오의병부터 1944년 안동농림조선회복연구단, 명성회 결성까지 51년 독립운동사를 빼곡히 채워놓고 있다.(표)

의병과 계몽운동, 의열투쟁, 3·1운동, 농민운동과 사회운동, 학생운동과 대중투쟁, 만주를 비롯한 중국을 무대로 한 해외 항일투쟁 등을 다양하고도 끊임없이 전개했다. 계몽과 혁신운동의 류인식,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선구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만주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주도한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의열투쟁 김지섭과 김시현, 사회주의 운동의 선두주자 김재봉, 6·10만세운동의 총괄기획자 권오설, 아나키스트 류림, 민족시인 이육사 등 어느 한 분야도 빠지지 않았다.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안동대 교수)은 "한 지역의 독립운동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안동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 51년을 거의 모두 담아냈으니 대단한 일"이라며 "한국독립운동사를 대표할 인물을 대거 배출한 안동이 한국독립운동의 성지로 불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1910년대, 3·1운동과 유림단 의거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숱한 안동인들이 목숨 끊어 항거했다. 문중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해외항일투쟁에도 나섰다. 안동에 남았던 사람들은 군자금을 모아 만주로 보내거나 의병운동에 나서고 다양한 교육시설을 설립, 혁신계몽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의병운동과 계몽운동가 사이에는 이념적 갈등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에 안동인들이 참가하면서 이념적 갈등보다는 나라를 되찾겠다는 같은 신념으로 조금씩 통합되기 시작했다.

3·1운동은 이같이 민족을 하나로 통합해내는 결정적 단초가 됐다. 안동의 3·1운동도 마찬가지였다. 3월 13일 안동면에서 이상동이 단독으로 시위한 뒤 14회나 곳곳에서 시위가 펼쳐졌다. 17일부터 23일까지 안동면과 예안면, 임동면에는 1천500명에서 3천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항쟁이 벌어졌다.

3·1운동에는 유림의 참여가 컸다. '파리장서'라는 독립청원운동이 별도로 진행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를 정리하려는 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고 이곳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글을 보낸 일이다. '제1차 유림단 의거'다. 1925, 1926년 유림들에 의해 '의열투쟁'이 있었으며 이를 '경북유림단 의거' '제2차 유림단 의거'라 불렀다. 유림단 의거는 그동안 외세를 '척사'의 대상으로 삼고 중화중심으로 여겼던 유림들이 '만국 평등' '세계 공의'라는 의식으로 변한 것. 파리장서에는 137명이 서명했으며 강원·충북지역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이들은 북경 독립운동기지를 만들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 모집에 나서기도 했다. 여기에는 향산 이만도의 동생 이만규와 아들 이중업, 손자 이종흠이 참여해 활동을 주도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과 신간회

안동지역 교육기관에서 배출된 학생들은 1920년 대중운동과 사회운동을 주도했다. 이 시기 안동지역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와 풍산소작인회가 결성됐다. 이들 단체가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이끌었다. 1925년 안동의 독립운동은 본격적인 사회주의 수용으로 전환점을 맞는다. 서울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관계한 김재봉·이준태·권오설 등이 안동의 민족운동을 한층 역동적으로 이끌었다.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 창립으로 민족협동전선이 이뤄졌다. 신간회를 통해 좌우 세력이 하나로 뭉쳐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에는 197명의 회원이 참여했다. 안동지역 독립운동계의 대부 류인식이 회장을 맡았으며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가 부회장을 맡았다. 간사에는 좌·우파 인물 24명이 맡았다.

창립 1년 후 1928년에는 회원이 600여 명에 달했다. 안동지역 청년운동단체 회원 전체가 참여했다. 신간회 안동지회 창립으로 여러 갈래로 흩어져 전개됐던 민족운동 노선이 통합됐다. 초기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세력으로 등장했으나 류인식 회장이 물러나면서 점차 사회주의 계열로 주도권이 옮겨갔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소작료 투쟁과 제세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 지주부담 등을 결의했다. 이 단체는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민중 생활상을 충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

이후 제3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안동의 풍산소작인회 간부 안상길·이회원, 안동청년동맹 권태동·이지호 등이 검거되면서 사회주의 운동이 난관에 부딪혔다. '경북공산당사건'이 발각되면서 안동사회주의는 소멸됐다. 남은 세력들이 '안동코뮤니스트 그룹'을 결성했다. 신간회 안동지회의 해소와 궤적을 같이했다.

김희곤 관장은 "안동 독립운동의 지속성은 지도적 반열에 있던 문중의 규모, 지도자 그룹의 지향성과 지도력, 학문과 사상으로 무장한 인력의 지속적 양성과 공급에 따라 유지될 수 있었다"고 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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