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5천ha 당근밭, 일년 절반은 강물채워 '지하수밭'으로
일본 에도시대 구마모토(熊本)의 첫 세습 영주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구마모토 시민에겐 숭앙의 대상이다. 가토 없이 구마모토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구마모토의 상징인 성(城)을 쌓은 것도 그렇지만 우물과 호수를 만들어 물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을 그들은 경외한다. 가토의 말발굽에 마을이 통째로 불탄 마을에서 자란 기자로선 과히 기분좋은 인물이 아니지만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지하수를 만들다=구마모토시 수보전과 데라모토 계장은 수원지를 구경시켜주겠다며 대구 동네우물되살리기팀을 구모모토시 외곽의 한적한 농촌으로 안내했다. 차를 세운 곳은 당근밭. 의아해하는 우리 일행에게 데라모토 계장은 "이 당근밭이 오즈수원지"라며 "5~10월이면 1만5천ha(450만평)의 밭이 물로 가득차 저수지로 변한다"고 했다. 전세계 어디에도 없을 수전(水田·물밭)이다.
지하수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농민들이 당근을 뽑아내면 다른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고, 끌고온 시라카와 강물을 이곳에 채운다. 농민에겐 휴경에 따른 보조금을 준다. 당근밭 토양은 화산암이 풍화된 흑토이고, 지반 또한 지하수를 많이 머금는 화산암이라서 물을 채워도 채워도 한없이 지하로 들어간다. 물의 침투율이 다른 지역보다 5배 크다. 다소 오염된 시라카와 강물은 천연 필터인 토양과 지층을 거치면서 깨끗한 지하수가 된다. 그렇게 만드는 지하수가 연간 1천500만㎥. 그 지하수는 20여 년이 지나면 구마모토시가 취수하는 81개 우물 가운데 어느 곳에서는 솟아 오른다. 30㎞, 50㎞ 떨어진 우물에서다. 이런 수원지가 오즈마을 이외에 인근의 기쿠요마을에도 있다.
그들이 이처럼 당근밭을 이용해 지하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도시의 확대와 전업농의 감소로 지하수 수위가 점차 낮아지고 있고, 가토가 만든 에즈호의 물이 점차 줄고 있어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택한 방법이다. 농사를 조금 줄이더라도 지하수 고갈만은 막고자 하는 그들의 몸부림이다.
돌이켜보면 지하수를 만든 최초의 인물을 가토 기요마사로 봐야 한다. 그는 400여 년 전 에즈호를 파고, 시라카와 강물을 끌어다 무논을 만들었다. 당시 가토는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그렇게 했으나 결과적으로 지하수를 만드는 부수적 효과까지 냈다. 놀라운 일이다. 그 때 그 전통을 잇는 구마모토시의 노력을 보며 몸서리친다.
◆물 숭배=구마모토의 수원지는 모두 21개다. 그 가운데 시라카와수원(白川水源)을 자랑한다. 아소산 남쪽에 자리한 시라카와강의 시발점 가운데 하나다. 시라카와수원에서 솟아나는 물은 매일 60㎥로 1년 내내 수온이 섭씨 14도 내외로 일정하다. 세계 최대인 아소산 칼데라호의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곳에서 솟아난다고 한다. 칼데라호에서 수맥을 타고 시라카와수원까지 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이 혹자는 1만여 년이란 설(說)이 있지만 아무래도 과장된 듯하다.
산길을 한참 걸어 도착한 시라카와수원의 물은 너무나 투명했다. 지하수가 송송 솟아나는 모습이 맨눈에 보였다. 일본인 관광객들은 이 물을 그냥 떠 마셨다. 시원한 물의 맛이 꽤 좋다.
수원 바로 위쪽에 신사(神社)가 있다. 물의 신에게 참배하는 장소다. 일본은 온갖 신을 모신다. 신사만 8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신이 참 많기도 하다. 그 가운데 시라카와수원처럼 물의 신을 모신 곳도 여러 곳이다. 지표수가 적은 섬나라 일본에게 물은 너무나 귀중한 생명줄이었기에 경배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물의 중요성을 아는 일본은 정부 주도로 좋은 물 100가지를 선정한다. 이른바 명수백선(名水百選)이다. 시라카와수원의 물도 1985년 명수에 뽑혔다.
◆싼 수돗물=켄군수원(健軍水源)의 물도 명수백선에 선정됐다. 우물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물로 수돗물을 만든다. 수돗물이 명수인 셈이다. 지하수로 수돗물을 만들어 가정에 공급하는 방식은 1924년부터 시작됐다. 90년 가까운 세월이다.
켄군5호우물은 하루 1만4천㎥가 솟아나는 일본 최대 우물이다. 5호우물에서 지하수가 용솟음치는 모양이 힘차다. 켄군수원의 여러 개 우물에서 생산되는 수돗물은 하루 모두 6만㎥로 구마모토 시민이 사용하는 물의 5분의 1을 담당한다.
켄군수원의 물로 수돗물을 만드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오염되지 않은 지하수인 만큼 물을 퍼올려 염소 소독을 한 뒤 펌프로 마을로 보내면 그만이다. 활성탄 오존 등을 이용한 별도의 정수가 필요없다. 지하수가 풍부하고 수돗물 생산 과정이 단순하다보니 값도 싸다. 구마모토시 관계자는 "수돗물 값이 다른 도시의 절반"이라고 귀띔했다.
◆친환경농업 보호로 지하수 지킨다=구마모토시 상하수도국 구내 식당에는 '밥 한공기가 지하수 1,500ℓ'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벼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지하수가 함께 만들어진다는 점에 착안, 구마모토의 쌀을 많이 소비하자는 취지다.
그리고 그 식당은 주류이키 지역에서 생산된 친환경 농산물만 납품받고 있다. 상하수도국 이와사 홍보담당은 "에코파마(친환경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농약과 비료를 보통 농사의 절반가량 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며 "에코파마는 건강한 지하수, 건강한 농산물을 만드는 사람이다. 에코파마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고 했다.
수전으로 지하수를 만들고 벼농사와 지하수를 연결하는 표어를 보면서 구마모토 사람들의 지하수 지키기는 생활 그 자체이다 못해 본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지표수 부족으로 농사를 짓지 못해 굶주렸을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존을 위한 본능 말이다.
구마모토시는 6년 전부터 물 절약 운동도 펼치고 있다. 수전을 통한 물 만들기와 함께 시작한 절수 운동이다. 구마모토시는 시청 앞 전광판에 수돗물의 질과 함께 1인당 물사용량을 매일 공지해 시민들이 절수 운동에 동참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고야마 세이시 구마모토시장은 "선조로부터 받은 지하수를 후손에게 물려 줘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인 결과 시민 의식이 많이 높아졌다"며 "6년 전 1인당 하루 물사용량이 254ℓ에서 230ℓ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미네랄이 적은 지하수=구마모토 지하수의 미네랄은 그리 많지 않다. 물 1ℓ에 녹아있는 칼슘(Ca)과 마그네슘(Mg) 이온량으로 계산하는 지하수 경도(硬度·세기)가 80~100이 대부분이다. 명수백선에 선정된 시라카와수원의 물이 경도 100을 조금 넘는 정도다. 구마모토시 공식 생수인 물이야기(水物語)에는 경도 84라고 적혀 있다. 대구 지하수는 경도 100이하가 거의 없고, 평균 200 이상 심지어 500이 넘는 곳도 있다. 결국 구마모토 지하수는 대구 지하수에 비하면 미네랄이 없다시피 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하수에 미네랄이 적은 것은 비단 구마모토 뿐 아니라 일본 전역이 거의 그렇다. 화산 폭발로 생성된 화산암이 대부분인 지질 때문이다.
빗물에는 미네랄이 없다. 먼지에 묻어 있는 미네랄 정도다. 미네랄은 물이 계곡과 대지, 또는 지하를 흐르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미네랄이 녹을 틈이 없는 강물에는 그래서 미네랄이 적다. 오염물질은 미네랄이 아니다. 반면 지하수는 오랜 세월 지하를 흐르며 다량의 미네랄을 녹인다. 하지만 일본의 지하수는 흐르는 속도가 빨라 나이가 고작 20살이다. 20년 동안 미네랄을 녹여봐야 그 양이 별로 많지 않다. 화산암 지대는 대개 그렇다.
반면 대구 같은 퇴적암 지대는 지하수 나이가 50살, 심지어 100살이 넘는 것도 있다. 고미네랄 내추럴워터의 비밀이다. '지하수 도시' 구마모토는 지하수가 풍부하고, 마시는 물을 100% 지하수에 의존해 붙여진 이름이지 지하수의 질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 것이다.
최재왕기자 jw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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