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느끼고, 삶을 변화시키자! 인문학, 대중 곁으로

입력 2010-09-25 07:11:49

시민과 소통…새롭게 주목받는 도시인문학

대구 중구청이 작가 김원일 씨를 초청해 소설
대구 중구청이 작가 김원일 씨를 초청해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배경이 된 도심을 함께 다니며 현장 강의를 들려준 투어 프로그램은 대구 도시인문학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18일 열린 2010 대경권 도시대학 입학식 참가자들이 특강을 듣고 있다.
'인문학의 메카'를 꿈꾸는 칠곡군은 청소년과 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인문학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꾸준히 기반을 다져와 성공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일 열린 2010 대경권 도시대학 입학식 참가자들이 특강을 듣고 있다.

18일 오후 군위군 한밤마을. 대율초등학생들과 교사, 학부모, 주민 등 50여 명이 학교 앞 소나무 숲에서 그네를 타고 제기를 차고 투호를 하면서 전통놀이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었다. 단순히 추석을 앞두고 열리는 마을 전통놀이가 아니라 계명대 논리윤리교육센터와 솔 열린대학이 인문주간을 맞아 진행한 '대구경북 기억하기'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참가자들은 놀이뿐만 아니라 전래동화와 동요를 함께 읽고 부르며 역사와 문화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다. 논리윤리교육센터 홍원식 교수는 "올해 인문주간 행사는 대구 골목길 답사, 낙동강 금오·동락·도동서원 답사, 전통놀이, 체험 애니메이션 등 일반인들이 직접 참여해 인문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며 "예상보다 참가자들의 반응이 좋아 한밤마을의 예절·체험교육 프로그램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1시 경북대 공학관 내 한 강의실.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2010 대경권 도시대학 입학을 앞둔 대구 중구와 남구, 경산시의 시민들과 구의원, 공무원,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팀을 만들고 주제를 선정하는 자리였다.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방안을 찾기 위해 11월까지 인문·건축·도시·시민 분야 전문가들의 지도와 특강, 동행 답사 등을 계속 받을 예정. 도시대학장을 맡은 경북대 건축학과 이정호 교수는 "시민들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도시와 건축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라며 "참가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을 만들기의 리더로 양성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거리로 나온 인문학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위기'를 부르짖으며 외부의 지원과 관심에만 목소리를 높였던 인문학이 대중의 품을 찾아 나서고 있다. 인문학은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세상을 통찰하고 스스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기본적인 공부다. 하지만 인문학은 일반인들에게 너무 어려운 '학문'이었고 삶과 인문학 사이의 친근성을 느끼기엔 지나치게 연구와 강단 중심이었다. 결국 인문학의 위기는 학자들의 위기였고 상아탑만의 위기로 치부됐다.

여기에 대한 반성이 인문학자들을 거리로 나서게 만들었다. 서울의 경우 낮은 곳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이 몇 년 전부터 활기를 띠고 있다. 노숙자, 재소자, 빈민, 성매매 여성 등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예상보다 높은 반향을 일으키면서 인문학 강좌와 프로그램이 자치단체와 도서관 등으로 확산됐다.

대구경북에서도 점차 인문학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계명대는 시민들과 소통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을 5년째 계속하고 있으며 경북대 인문대학은 한국연구재단 지원 사업으로 시민 대상 인문학 강좌를 시작한 뒤 현재는 동부도서관에서 자체적으로 '생활 속 인문학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대학, 연구소 등과 함께 답사, 스토리텔링, 체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시민들에게 알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계명대 홍원식 교수는 "최근의 움직임은 인문학이라는 학문 차원이 아니라 인문정신과 인문적 가치를 일깨우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라야 대중에게 접근할 수 있다는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인문학의 위기 해결책이 다양하게 모색되지만 무엇보다 대중화가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도시인문학 열풍

인문학 대중화와 함께 새롭게 주목받는 분야가 도시인문학이다. 도시화의 종반에 접어든 현 시점에서 도시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기준은 이제 속도나 물량이 아니라 문화라는 인식이 국내 도시들 사이에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특히 도시인문학은 도시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이 문화를 살리고 그 문화가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선순환이 핵심이라는 측면을 강조하며 시민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

서울, 인천 등에서는 이미 도시인문학 관련 연구소가 문을 열고 연구와 실행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구의 경우 기초자치단체 수준에서 움직임이 활발하다. 특히 중구는 풍부한 역사·문화 자산을 활용해 도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거두고 있다. 동성로, 종로, 북성로의 가로 디자인 개선과 마을 만들기 사업 등이 잇따라 추진되고 골목투어, 거리 축제 등이 활성화되면서 주민 의식까지 바뀌고 있다. 지난해 이후 3번의 도시대학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부분의 시민이 중구민이라는 사실만 봐도 중구의 변화는 뚜렷이 드러난다.

칠곡군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인문학 메카' 만들기 프로젝트도 눈길을 끈다. 칠곡군은 올 상반기부터 인문학 아카데미를 월 2회 개최하고 10월부터 연말까지는 경북대와 함께 인문학 특강을 매주 개최하는 한편 11월 5, 6일에는 평생학습 인문학 축제도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장세호 칠곡군수는 "경제가 아니라 문화적 지표가 중요한 시대인 만큼 인문학을 통해 군민들이 행복한 도시로 만들어나갈 계획"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칠곡군은 올해 인문학 포럼을 개최해 전문가와 주민들의 역량을 모은 뒤 전국 단위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나아가 세계적인 인문학 포럼을 개최해 칠곡군을 한국 인문학의 중심지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작은 일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중·장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전문가들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인문정신 높이는 게 과제

인문학이 강단의 인문학, 지식인의 인문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궁극의 과제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요원하다. 대중이 아니라 인문학자들부터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칠곡군과 함께 인문학 특강을 진행할 경북대 인문대학 교수들은 요즘 강의 주제와 방법 등을 잘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대중 강연 경험이 부족한 일부 교수들이 주제 선정부터 어렵다고 토로하면서 "좋은 강의를 위해 무엇이든 해 보자"고 결의를 다졌고 예비 워크숍, 예비 강의까지 진행하는 열의를 보이고 있다. 경북대 노어노문과 이강은 교수는 "인문학이 대중과 친해지려면 재미도 있어야 하지만 삶 속에서 필요를 느끼고 삶을 변화시키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는 진정한 공부가 돼야 한다"며 "학계 스스로 한때의 유행처럼 받아들이거나 연구 없이 대중에게 다가갔다가는 지금보다 더한 인문학의 위기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급속하게 번지는 CEO나 기업 대상 인문학 열풍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라는 분석 못지않게 부정적 시각이 많다. 특히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최근 아이패드를 발표하면서 "애플은 항상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서 고민해왔다"고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상황을 우려하는 이들이 적잖다. 기업의 경영 개선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도구로 비칠 경우 인문학 본연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북대 이강은 교수는 "자본의 발전과정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자본과 인간이 화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어야 인문학의 활로가 있다"며 "인문학의 대중화 과정을 통해 대학과 전문가 사회 스스로 통렬한 자기반성이 이뤄져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재경기자 kjk@msnet.co.kr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