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門에서 華岳까지](39)유천지맥 남부

입력 2010-09-25 07:20:09

동창천 끼고도는 임금산, 한때 임금이 살았다는데…

동창천 너머로 보이는 유천 일대. 맨 뒤로 보이는 산덩이가
동창천 너머로 보이는 유천 일대. 맨 뒤로 보이는 산덩이가 '임금산'이라고도 불리는 유천지맥 막내 501m봉이며, 그 기슭 복판에 '대운암'이란 암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유천은 오랜 세월 일대의 중심지 마을이었다.

용각산서 족두리산(729m)까지의 유천지맥 길이는 9㎞다. 겨우 전체의 40% 정도 달린 셈이다. 그러나 지맥은 그쯤서 일찌감치 권역을 바꾼다. '남부' 구간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남부 산권 중심은 매전면 송원리(松元里)다. 최고봉 족두리산은 이 마을 북쪽 꼭짓점이다. 그 이후 지맥 본맥은 마을 서편 담장, 족두리산서 갈라져가는 '지소능선'은 동편 담장이다. 그리고 지맥 마지막 피날레인 '오례산성' 최고 626m봉은 마을 남산이다.

유천지맥은 족두리산을 떠나기 전에 남동쪽으로 먼저 '지소능선'을 갈라 보낸다. 매전면 지전리 지소(紙所)마을까지 내려선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길지 않고 흐름도 완만해서, 3㎞쯤 떨어진 마지막 546m봉까지 7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출발 후 8분쯤 될 지점서는 길 찾기에 정신을 집중시켜야 한다. 한 묘지를 거쳐 도달하는 686m 구릉이 위험지점이다. 거기서만 방향을 잘 잡으면 4분쯤 후엔 매우 평평한 곳에 도달된다. 밭으로 개간하면 수십 마지기는 족히 나올 듯싶고, 서편으로 경운기 길도 나 있다. 그걸 20여분 따라 걸으면, 조금 후 살필 '큰고개' 인접 아스팔트 도로에 연결된다.

저 평탄지점서 1분가량 내려서면 첫 잘록이인 571m재다. 용당골 길목이라 해서 '용당골재'로 불려 왔다고 했다. 거기서 올라 도달하는 644m봉은 '넙덕등'이라 했다. 상부가 평원 같은 등성이다. 다시 내려서는 595m재의 경우 송원리서는 '솔안길'이라 했고, 예전리 용전마을에선 마을 뒤에 있다고 해서 '뒷고개'라 불렀다. 동창천변서 청도읍을 내왕하는 관문이었다는 얘기다.

솔안길 잘록이를 거쳐 올라서면 서쪽 지릉에 '누룩덤'이 있고 동편엔 습지가 있다는 628m봉이다. 이걸 용전서는 '무구덤'이라 한 반면 송원서는 '솔골만댕이'라 했다. 무구덤을 지나 닿는 마지막 봉우리인 546m봉을 두고도 두 마을 사이에 호칭이 달랐다. 송원리서는 '만사덤', 용전서는 '장군덤'이라고 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용전서 무구덤이라 한 것 외에 송원서 그렇게 부르는 봉우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넙덕등서 서쪽으로 뻗는 지릉 첫 봉우리인 631m봉이 그것이다. 두 무구덤 사이 골은 '무구덤골'이었다. 631m 무구덤 다음의 602m봉은 '솔안(등)', 그 마지막 581m봉은 '부엉덤'으로 불리고 있었다.

유천지맥 본맥은 저 지소능선을 갈라 보낸 뒤 서쪽으로 출발해 10분 이내에 아래족둘바위(637m·대호암바위)에 닿는다. 막힐 것 없이 탁 트인 통바위 큰 봉우리다.

그 뒤 지맥은 유명한 '큰고개'(416m)로 몸을 낮춘다. 송원리 일대 매전면 권역과 청도읍을 잇는 수백 년 된 잿길이다. 그러다 그 남쪽에 '양지넘'이란 잿길이 개척되면서 기능의 상당 부분을 물려줬던 고개라 했다. 하지만 큰고개의 중요성은 앞으로 다시 커질 듯하다. 고개 양편의 송원리~원정리 사이에 자동차도로가 뚫리고 있기 때문이다. 송원리 쪽엔 진작 길이 났고 원정리 구간 3.6 ㎞도 최근 착공돼 2013년 봄이면 완전 개통될 예정이라 했다.

큰고개는 옛 기록들에 '巾峙'(건치) '楗嶺'(건령)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건태'라는 송원리 자연마을 이름도 거기서 유래했을 터이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그 고개를 오직 '큰고개'라고만 불렀다. 명칭에 쓰인 한자들이 '큰티'(큰고개)의 음 표기를 위해 동원된 것에 불과함을 증언하는 자료일 것이다.

유천지맥은 큰고개서 100여m 솟아 511m봉에 오른 뒤 532m봉에 도달한다. 청도군 쓰레기 매립장 북편 봉우리다. 거기서는 서편으로 긴 지릉이 갈라져 나가 청도읍 원정리와 그 남편 구미리(九尾里)를 구분 짓는다.

532m봉 혹은 매립장 지점과 오례산성 사이 3.5㎞ 구간 지맥은 532m봉~512m재~594m봉~443m재~594m봉~473m재~산성 순으로 연결돼 있다. 양쪽으로 이어진 빨랫줄 중간에 2개의 594m봉이 솟아 바지랑대 역할을 하는 양상이라 할까.

매립장 입구서 내려서는 512m재는 '당고개'라 했다. 찻길도 연결돼 있다. 하지만 당고개서 다음의 594m봉 오르는 길은 없다. 산길은 594m봉 서편 옆구리를 감아 돌아 그 다음의 443m재로 바로 이어 가버린다. 생잡이로 직진해 올라야 하는 594m봉은 워낙 펀펀해 어디가 정점인지 금방 집어내기조차 어렵다. 이런 594m봉을 서편 박월마을(월곡2리)에서는 '문바위양달'이라 불렀다. 비탈에 '문바위' 등등의 하얀 암괴와 층덤들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했다. '문바위봉' 정도로 불러두면 무방하리라 싶다.

문바위봉은 올라서기 힘들지만 내려서기는 더 어렵다. 다음의 443m재를 향해 이어가는 맥이 안 보여서다. 꼭짓점서 평평히 이어지는 능선이 없는 건 아니나, 그걸 좋아라 따라 걷다간 고생만 한다. 송원리 골로 하강하는 매립장 남릉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방향을 잡아 내려선 443m재는 매우 펀펀했다. 옛날 나물 뜯으러 다니던 아주머니들이 솔방울로 야구 놀이를 하던 곳이라는 얘기가 실감났다. 이 재를 일대 마을들에서는 공히 '양지넘'이라 불렀다. '큰고개' 대신 부상했다는 그 길목이다. 송원리 쪽으로 등산로가 있는 듯 시그널들이 붙어있었다.

양지넘서 두 번째 594m봉 오르는 구간은 간벌이 잘 돼 있고 등성이도 널찍해 걷기에 시원스럽다. 오르내림도 완만하다. 이 봉우리를 서편 금호마을 어르신은 '면주름'이라 지칭했다.

거기서 내려서는 473m재는 지나온 산덩이와 남쪽의 오례산성 산덩이를 완전히 갈라놓는 듯한 잘록이다. 그 양쪽 마을들 이름을 따 '사기점(사촌)고개' 혹은 '건태고개'라 부르고 있었다.

473m재에서 산성은 13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연결점 높이가 610m 미만으로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 연결점에 도달해서 동쪽(왼편)으로 걸으면 얼마 후 일대 최고점인 626m봉에 닿는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내려서면 산성을 둘러 싼 두 개의 산줄기 중 동편 것으로 이어진다. 동창천변 국도에서 볼 때 바위들로 하얗게 장식된 그곳이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길목은 키가 2m쯤 되는 풀숲에 완전히 묻혔다. 바로 옆도 분간 안 된다. 묘지들이나 간혹 빠끔하게 틔었을 뿐이다.

유천지맥 남부권 중심마을이라 했던 송원리 경계는 여기까지다. 그 넓은 권역에 '윗건태' '아랫건태' 두 마을이 아래·위로 나뉘어 분포했었다. 윗건태는 매전면 소속이면서도 청도읍 생활권이었다고 했다. 청도읍 시가지 입구 흑석마을(원정2리)과 불과 10리 길이기 때문이었다. 학생들이 읍내 중학교 등으로 매일 통학할 정도였다. 그럴 때 넘어 다니던 재가 '큰고개'였다.

하지만 지금 윗건태마을은 사라지고 없다. 거기 닥친 첫 위기는 6·25 때 빨치산 근거지를 없앤다며 마을을 불태운 것이었다. 열댓 집 되던 주민들은 청도읍 흑석마을과 화양읍 눌미리 등으로 흩어졌다. 전쟁이 끝난 뒤 일부 주민들이 다시 돌아가 마을을 이뤘으나 그 이후엔 도시화라는 쓰나미가 닥쳤다. 마지막 주민이 그곳 '접산골'을 떠난 건 1980년쯤이었다고 했다.

'아랫건태'라 불리는 지금의 송원리 본마을 주력은 감농사인 듯 보인다. 하나 그곳 어르신은 감농사 경우 근래 시작한 것일 뿐이고, 1950년대까지만 해도 땔나무를 해서 큰고개·양지넘 너머 청도장에 내다 팔아 살았다고 했다. 그러던 아랫건태는 도시화라는 세파를 견디면서 아주 오래 전 우리네 산촌 모습을 지금도 잘 유지하고 있다. 이런 마을이야말로 애써 보전해야지 않을까 싶다.

유천지맥 본맥은 산성 연결점에서 서편으로 이어져 내려간다. 이후 줄곧 내리막이고 도달하는 최저점은 451m재다. 그 재에는 서편 계곡마을(거연리)서 임도가 올라 와 있다. 산성 안으로까지 경운기 길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산성권역은 그 잘록이서 올라서는 518m봉에서 종료된다.

그곳 '오례산성'(烏禮山城)은 이서국 때부터 요충지였으리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 패망의 역사가 고스란히 쌓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서국 군사들이 떼로 목숨을 잃었다는 마전암(馬轉岩)이 바로 앞 동창천 건너에 있기도 하다.

신라 또한 청도 땅에 설치한 3개 행정구역 관청 중 하나인 '오도산성'(烏刀山城)을 이 자리에 뒀다. 그럴 시기 산성은 일부 외벽을 흙으로 보강한 토성이었다고 했다. 지금 많이 남아 있는 성벽용 돌덩이들은 임진왜란 직전 전국적으로 시행된 축성공사 흔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성은 왜군에 의해 간단히 점령되고 말았다고 했다. 그 산을 '오리산'이라 부르는 것에 착안해 그 꼬리에 해당하는 유천 쪽에서 치고 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근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도 일대를 '오리산'이라 지칭한다. 1918년 일제가 만든 최초의 등고선 지형도는 '오리 부'(鳧)자를 써 '부산성'(鳧山城)이라 번역 표기해 놓기까지 했다. 성안에는 30여 년 전까지 2가구가 살았고, 다랑논이 상당면적 경작됐었다고 했다. 근년엔 골프장 건설이 추진된 적 있다는 얘기도 들렸다.

오례산성 혹은 오리산성 성안 권역은 저렇게 마감되지만, 유천지맥은 518m봉을 지나고도 계속 이어간다. 군데군데 쓰레기만 숱할 뿐 길이 보이지 않아 답사가 불가능한 봉우리들이다. 지맥은 그 후 마지막 501m봉으로 솟는다. 남사면에 '대운암'(大雲庵)이 자리 잡은 그 봉우리다. 그 남서쪽 유호2리서는 저 절을 '임금절'이라 불러왔고, 마을이 임금이 살던 터라는 얘기도 있다고 했다. '임금절'서는 유천지맥 종점 '유천'이 잘 내려다보인다.

유천(楡川)지구 분위기는 상당히 독특하다. 여러 기관과 가게들을 갖춰 면 소재지급 풍모를 보이는 게 첫째다. 읍 단위에나 있을법한 극장 건물까지 있다. 1929년에 초등학교가 생기고 100여 년 전 우체국이 문 열었을 정도로 일찍 성장한 소도시라 했다. 일제강점기에 벌써 전기가 공급됐으며, 장사하는 일본인이 많이 식민(植民)해 지금까지 왜식건물이 4채나 남아 있다고도 했다.

거기다 유천은 청도천·동창천 두 물길 합류점이다. 두 물길 사이로 튀어나온 이런 지형은 흔히 '갑지'(岬地)라 불린다. 거의가 배산임수(背山臨水)로 전망이 트인 명당이다. 거기 절벽이 솟았다면 옛사람이 애써 정자를 지었을 터이기도 하다. 자연과 인문의 이러저러한 특성이 유천으로 하여금 이호우(1912~1970) 이영도(1916~1976) 남매 시인을 낳게 했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 시장은 문을 닫고 영화관은 폐허로 남았다. 한때 870명에 달했다는 유천초교 아동은 겨우 10명으로 줄었다. 그곳 거리가 1960년대 풍경의 영화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이유다. 이게 유천의 두 번째 특징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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