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오른 채소 과일 값에 놀란 서민들에게 올 추석은 다소 고통스러웠다. 갑작스런 폭우와 뚝 떨어진 아침 기온,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한 방에 날려버린 남다른 '추석 인사'로 올해 한가위 기분은 한껏 고무됐다. 그 추석 인사는 축구장 그라운드에서 나왔다.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도 잊고 남미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열린 FIFA 주관 U-17대회에 참가한 한국 낭자들이었다.
추석 새벽에 벌어진 스페인과의 결승 진출전. 전반 초반에 이미 선제골을 허용한 상태였다. 그러나 2분 후 미드필드에서 상대의 공을 가로챈 김나리가 멋지게 크로스를 했고 달려들던 여민지가 자로 잰 듯이 다이빙 헤딩 슛, 상대방 그물을 갈랐다. 17살 소녀들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정밀함과 침착함 그 자체였다. 승부사 기질을 드러낸 감각적인 슛이 아닐 수 없었다.
동점골을 성공시킨 한국 선수들은 일렬로 서서 큰절로 국민들에게 추석 선물을 보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기세가 오른 대표팀은 다시 10여 분 후, 국민을 열광시켰다. 여민지의 패스를 받은 주수진이 숲으로 둘러싸인 수비진을 뚫고 마지막 골키퍼까지 제치는 개인기로 그림 같은 골을 성공시킨 것이다. 이후 서로 위기 상황을 주고받았지만 전세를 뒤엎지는 못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첫 FIFA 주관 대회 결승 진출 순간이었다. 불과 두 달 전, 지소연을 앞세운 U-20 여자 대표팀이 4강에 진출, 3위의 성적을 낸 것이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남자 축구는 1983년 멕시코 U-20 월드컵(당시 세계청소년대회)과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것이 최고였다.
여민지는 이번 대회 최고 명승부 중 하나인 나이지리아와의 8강전에서 무려 4골을 뽑아내며 6대 5의 짜릿한 역전승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이번 경기 5게임에서 8골(3도움)을 넣으며 득점 단독 선두에 올라 있다.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이길 경우 우승 트로피와 함께 득점왕과 골든볼 등 3관왕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태극 낭자들의 DNA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승부를 떠나 모레 26일 오전 7시 일본과의 결승전은 또 한 번 국민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다. 어린 선수들의 투혼은 바로 우리의 미래 자산이 아닌가. 열악한 환경에서 꽃을 피운 그라운드의 '소녀 시대'에 감동의 박수를 보낸다.
윤주태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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