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첫사랑의 추억

입력 2010-09-17 08:00:00

다소곳하던 그 소녀가 이제 나의 성가신(?) 아내가 되어…

♥ 아직도 결혼을 안했다니 혹시?

나무처럼 50여 년의 나이테를 가지고 있는 그녀, 평범한 이웃집 아주머니 말투로 대뜸 "병욱아, 나다. 잘 지내고 있나?"라고 물어온 그녀.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처럼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친근하고 익숙한 목소리로 다가왔다. 그녀는 중학교 졸업 후 가정형편상 진학을 못하고 지역 내에 있는 여고 교무실에서 잡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방학이 되면 그 학교 담벼락에서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기다렸다가 퇴근하면 들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얼마 후 그녀는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나와 함께 걷는 게 부담스러웠던지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고 난 사복을 입고 찾아갔지만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불쑥 교무실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 교문 앞에 서성거리다가 오기를 몇 번, 2년 뒤 그녀는 여고에 입학했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전교 1, 2등을 다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매우 기뻤다.

우리의 세월은 어느덧 오십 줄에 걸터앉아 그녀의 소식을 바람결에 전해 듣곤 했는데 얼마 전 그 바람이 그녀를 데리고 왔다. 여고 졸업 후 공무원시험에 합격해서 지금은 복지사로 활동하고 있고 맏이답게 동생들 공부 다 시켜서 시집 장가 보내고 나니 왠지 허전해서 지금은 상담과 봉사활동을 하며 즐거움을 찾는다고 했다. 동생들이 많아 결혼을 꿈도 못 꿨는데 지금은 꿈꾸고 있는 결혼이 꿈에서나 이루어질라나? 하며 쓴웃음을 짓는 그녀.

불쑥 "너, 나한테 상담 한번 받아 볼래?" 웃으며 말하는데 나의 어두운 표정을 들켜버렸는가 싶어 부끄러워 말 못하고 있으니 "남자 나이 오십이면 마누라를 무서워할 때거든. 왜 그런지를 알아야 할 거 아냐?"라고 했다. 나이 오십은 피차 마찬가진데 그녀는 어쩜 누이 같기도 하고 해맑은 웃음이 마치 소녀 같다. 소녀 같은 누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니? 무서운 거니?

김병욱(대구 북구 태전동)

♥ 동창회서 다시 만나 일년만에 결혼

아내의 잔소리 수위는 가을 하늘만큼이나 높아만 간다. 언어에 힘이 더해지고 공간적, 인지적 영역이 점차 넓어져 있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가슴속에 묻어두어야 아름다운 거라고 하는 모양이다. 첫사랑은 가슴 설레고 생각만으로도 충만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나는 그 그리움을 15년 동안 가슴에서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기를 반복하면서 살았다. 보고 싶어하면 할수록 추억은 되살아나고 그리움은 더욱더 짙어만 갔다.

연합고사(당시 고등학교 입학시험)를 준비하면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십 오리 길을 달리는데, 달빛 아래 중학생 남녀 이야기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밤길에서 하얀 폐비닐이 펄럭거리면 귀신인가 싶어 등이 오싹했던 기억, 노루가 사람 소리에 놀라 화들짝 달아나면 '어머나!' 하고 더 놀라서 움츠렸던 그녀. 놀라긴 마찬가진데 그래도 남자니까! 내색할 수 없었던 무서운 기억들마저도 추억이다.

아련한 추억들은 파편처럼 박혀 있어 흰 머리카락이 삐쭉삐쭉 올라와도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리움을 접어야 할 사건이 있었다. 고향 찾는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일부러 추석 다음날로 정한 동창회. 명절 다음날 모두 바쁠 텐데 누가 참여할까 싶었는데 의외로 여자 친구들이 동창회를 핑계 삼아 명절증후군에서 벗어나고 싶었던지 더 많이 모여 들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아내와 자녀들이 함께 와서 식구들 챙긴다고 정신없고 여자 친구들은 시댁에서 도망 나오듯 나왔으니 혼자였는데 나를 에워싸고 중매를 해 주겠다고 난리였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옛날에 너희 둘 서로 좋아했잖아? 이날을 기다렸구나, 맞지?"

그 무리들 속에 나의 첫사랑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그리움의 날개는 접고 행복의 날개를 폈다. 아내는 더 이상 '어머나' 하며 놀라지 않는, 세 아이에게는 무서운 엄마이면서 첫사랑이자 끝사랑을 주장하며 늦은 귀가를 감독하는 성가신(?) 아내로 살아간다.

이렇게 솟아날 구멍이 없을 땐 첫사랑을 떠올려본다. 고요한 달빛 아래서 자전거 타고 달리는 맑은 눈동자를 가진 단발머리 열여섯 살 소녀. 그 아이는 지금 잠시 외출중인가? 긴 여행 중인가?

피재우(대구 수성구 만촌3동)

♥ 생각이 늘 앞섰던 2살 연상 그녀

첫사랑은 말만 들어도 설렙니다.

25년 전 첫사랑의 추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2살 연상의 그 사람은 생각도 늘 나보다 앞섰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의 말과 행동이 어리광으로 비치지 않았을까 부끄러운 생각도 듭니다. 첫사랑은 무조건 헤어진다는 징크스 때문에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떠나버릴까 하는 생각에 그 사람을 피곤하게 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합니다.

5년 동안, 싸운 일이 거의 없었기에 지금도 그립고 가슴 떨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오스카 극장 내 다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습, 뮤직 박스 디제이에게 '사랑의 연인'을 신청하고 함께 듣던 추억이 생각납니다.

새삼 '첫사랑의 추억'이라는 주제를 보며 추억 속의 그 사람을 떠올려봅니다. 첫사랑은 추억 속에 두어야 한다고 하지요. 나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그 사람도 같은 하늘 아래서 행복하고 건강하길 바랍니다.

김태구(대구 달성군 다사읍)

♥ 나의 첫사랑은 '현재진행형'

'모태 솔로'. 어느 날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 들은 낯선 단어였다. 태어날 때부터 솔로였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고 보니 33년을 나 또한 모태 솔로로 살았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항상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연애 한번 해 보지 않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하지만 나는 나름 행복하게 살았다. 가족들과 하나 둘씩 태어나는 조카들을 보면서 행복했다. 그렇게 33년을 홀로 지내던 나에게 친구가 나와 이미지가 너무 많이 닮았다고 꼭 한 번만 만나보라며 그를 소개시켜줬다.

숫기가 없어 마주 앉아 말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던 친구의 말과 반대로 너무나 적극적이고 유창한 말솜씨에 내심 바람둥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다. 두 번을 만나고 그는 나랑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너무 적극적인 그의 태도에 도망도 가고 밀쳐내기도 했지만 믿고 그 자리에만 있어 달라는 그의 말에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2009년 1월에 만나기 시작하여 올 6월에 우리는 결혼했다. 그리고 지금은 허니문 베이비로 둘이 아닌 셋이 됐다. 33년 동안 단 한 번의 연애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고 나의 첫사랑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 되었다. 단,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드는 건 나는 그의 첫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문득문득 그의 첫사랑의 추억은 어땠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서미화(대구 서구 평리6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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