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출근길 호사

입력 2010-09-15 07:33:41

집 근처에 작은 산이 하나 있다. 소나무며 참나무, 고로쇠며 아카시아 등이 제법 울창한 숲을 드리운 산, 넉넉한 품속으로 호젓한 길을 내주어 생활에 지친 사람들을 가만히 품어주는 그런 산을 지척에 두고도 무엇이 그리 바빴던 걸까. 정작 그곳을 찾게 된 것은 피로가 누적된 내 허리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난 후였다.

묵직하고 기분 나쁜 통증 같은 것이 생겨서 검사를 받았더니 디스크라고 했다. 당장 수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시해 버릴 수도 없었다. 통증이 잠을 불편하게 했고 더 진행되면 신경이 눌려서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같은 자세로 검사를 반복해야 하는 직업이 문제라는데 그렇다고 당장 하던 일을 그만두고 편하게 치료만 받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우선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도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걸으란다. 앉아 있는 시간을 줄이고 바른 자세로 가능한 한 많이 걸으라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걸어서 출퇴근하기다. 평소에도 걷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었다. 마음으로야 걸으라면 고비사막도 넘고 백두대간도 걸어 넘겠지만 시간에 쫓겨 지내는 현실은 늘 걸음이 아쉽다.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날마다 하는 것이 출퇴근이니 그 시간이 가장 걷기 좋은 시간임엔 틀림이 없었다. 무작정 걷기로 했다.

맨 처음 들어섰을 땐 감탄사가 먼저 흘러나왔다. 번화한 도시 한가운데 있는 야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몸에 닿는 바람이 달랐다. 폐부로 깊숙이 흘러드는 그 바람 속엔 밤새 수런거렸을 나무들의 이야기가, 이른 아침부터 깨어 불렀을 풀꽃들의 노래가,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막 눈뜨는 이끼들의 푸른 호흡이 가득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빛깔의 공기들로 내 몸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길 양쪽으로 도열하여 핀 온갖 종류의 나팔꽃들과 연보랏빛 청남빛 닭의장풀들을 지나 산을 걸을 땐 내가 거기 숲속나라에 초대받은 귀빈이라도 된 듯했다. 이제 익기 시작한 산대추 한 알을 따서 우물거리는 일도 상큼했고 손을 꼭 잡고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걷는 나이 지긋한 연인들을 보는 느낌도 신선했다. 마주 오는 사람과 스칠 듯 목례로 지나는 좁다란 오솔길에선 인연과 관계와 삶에 대한 어떤 생각들로 내 머리는 아침 햇살에 일제히 손 흔드는 나뭇잎처럼 반짝거렸다. 예기치 않은 허리의 불운이 불러다 준 이 풍성한 숲길의 호사라니!

이즘엔 걷는 양이 꽤 많아졌다. 걸어서 바다까지 저 하늘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걷기'가 고장 난 허리를 치료하기 전에 내 흐려진 영혼을 먼저 바꿔놓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한 시간 일찍 출근길에 오른다. 자박자박 걸어서.

원 태 경 내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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