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도 즐거운 '벌초잔치'…남후섭 대구서부도서관장

입력 2010-09-11 08:08:25

우리 집안은 매년 음력 7월 마지막 주말에 경북 청송의 고향에 모여 벌초를 한다. 올해는 지난 주말(4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벌초를 했다. 매년 이맘때 여기에 모여 함께 벌초를 하는 후손들은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한분 고조 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형편에 따라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아침 식사 전에 도착하여 삼삼오오 조를 짜서 조상님들 산소의 풀을 베고, 가져갔던 탁주를 한 잔 부어 놓고 배례를 한다. 물론 시월 시사 때 별도의 방문은 있지만 말이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 날을 정해 함께 벌초를 한 지는 거의 30년이 되었다. 나는 나의 고조 할아버지 대부터 장손이다. 6대조의 맏이는 일찍 만주로 가셨고 5대조의 맏이는 부산으로 가서 이후 고향을 멀리하고 찾지를 아니하니,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던 우리 고조 할아버지 후손들이 이 일을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나 역시 아버지께서 고향을 지키실 때까지는 벌초의 고된 수고를 몰랐다. 1984년 봄날, 아버지마저 조상님들께로 돌아가시고 나니, 그해 가을부터 벌초는 내 몫이 되었다. 아직까지는 고향에 당숙 한 분이 계셔서 집안의 큰 연례행사라고 할 수 있는 벌초를 큰 어려움 없이 내가 주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비록 처서(處暑)는 지났다지만 늦여름의 날씨는 산소를 찾아 산에 오르는 우리를 힘들게 한다. 등에 맺힌 땀은 내의에 스며들다 못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숨은 턱 밑까지 차오른다. 우리는, 내게는 8대조 할아버지까지 무려 서른 기나 되는 산소를 벌초한다. 늦여름 뙤약볕 밑에서 비지땀을 흘릴 때마다 '왜 한 곳에 계시잖고 이산 저산 꼭대기에 흩어져 누우셨느냐'고 투정 아닌 투정을 애교 있게 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아마도 도시생활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마냥 즐겁다. 어릴 때 그 산에서 소는 풀을 뜯게 하고 우리는 주인 없는 야생의 복숭아를 따먹던 이야기며, 감자 서리, 밀 서리 하다가 주인에게 들켜 일장 훈시를 듣던 이야기들로 그야말로 지나간 날의 아스라한 추억에 젖어든다. 그리고는 예초기를 운전하다 잠시 쉬는 참에는 계곡에서 물고기며 가재를 잡던 이야기들로 꽃을 피운다.

또 한 나절 벌초를 하고 점심 식사 때가 되어 모이면 곳곳에서 제각기 살아가던 후손들이 이 날을 위하여 준비해 온 돼지고기, 생선회, 과일에다 고향집 텃밭의 무공해 채소로 안사람들이 음식을 맛있게 장만하여 푸짐하게 차려 내니, 할배·아재·조카들과 함께 땀을 흘린 뒤 나누는 음식 마당에서야말로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차려 주시던 밥상에 앉은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거기에다 탁주까지 한 잔 들이켜며 고향 마을 근황이며, 서울 부산 등지에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부득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의 소식을 인편으로 들으면서 함께 기뻐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래를 생각하면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벌초에 참석하는 후손들은 대부분이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다. 고향은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때 묻지 아니한 산천에서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았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마흔이 되지 않은 세대들은 고향의 넉넉함을 잘 모른다. 벌초를 하고 조상의 산소를 찾는 것이 효·불효를 떠나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라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깊은 정을 나누기보다는 조석으로 변하는 도시 생활의 화려함과 각박한 도시 문화에 온 정신을 빼앗겨 벌초에 소모하는 시간과 경비라면 차라리 대행업체에 맡기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세태이다. 아무튼 우리 집안이나 남의 집안 할 것 없이 십 년만 지나면 산소는 우거지고 찾아가는 길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닐는지? 우리 세대가 끝나면 조상님들의 산소는 과연 어떻게 될지? 어리석은 나도 그것이 그저 걱정스럽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죄송스러울 뿐이다.

남후섭(대구시 서부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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