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理性)으로 구습을 타파하고자 했던 계몽주의자들은 중국의 과거제(科擧制)에서 희망의 불꽃을 발견했다. 세습이 아니라 능력으로 관리를 뽑는다는 것은 엄청난 문화 충격이었다. 그들에게 과거제는 철인(哲人) 황제가 다스리는 이상국가의 인재 선발 방식이었으며 유럽의 중세적 어둠을 걷어낼 수 있는 촛불이었다.
과연 과거제가 이런 찬양을 받을 자격이 있었을까. 중국은 별도로 치고 조선의 과거제부터 알아보자. 조선조 문과(文科) 급제자는 모두 1만 4천333명이었다. 이 중 1만 3천882명(96.5%)이 전주 이씨 등 이름 있는 양반 가문 출신이지만 본관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451명(3.1%)이나 된다. 이들 중 절반(225명)이 조선 건국 후 100년 이내의 시기에 몰려 있었다. 이때까지는 '좁은 문'이지만 내세울 본관조차 없는 서민들에게도 시험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중기를 넘어서면서 사정은 급변한다. 본관 불명 급제자 수가 격감하는 것은 물론 전체 급제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국초 100년간의 15%에서 조선 말기에 이르면 1%대로 하락한다.('조선과 중국, 근세 5백년을 가다' 기시모토 미오'미야자와 히로시, 역사비평사) 한계는 있었지만 서민에게도 기회를 부여했던 과거가 세도 가문끼리 나눠 먹는 '그들만의 리그'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퇴행적 변화가 조선을 망국으로 이어지게 했는지 아니면 조선이 망했기 때문에 과거제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어쨌든 과거제의 퇴행과 조선의 쇠퇴가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딸 부정 특채 사건으로 우리 지도층의 도덕적 퇴행과 탐욕의 벌건 살이 드러나고 있다. 감사원이 뒤늦게 공무원 특채 전반에 대해 칼질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우리 사회가 이미 불공정 리그가 된 지 오래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지금이라도 드러났으니 다행이라고 자위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너무 추하다. 그 위로 동탁(董卓)의 배꼽에서 타오르는 불꽃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유 전 장관 딸 사건과 외무부 관리 자녀가 외무고시 2부 시험 합격자의 41%에 달한다는 통계는 민주주의 근간인 '기회의 평등'을 원천 봉쇄한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행정고시 폐지에 국민들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정고시 폐지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려는 기득권자들의 음모의 냄새를 맡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들만의 리그는 이미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행정고시 폐지는 여기에 합법의 옷을 입히려는 절차일 뿐이다. 이런 것이 지금 서민들의 생각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수사(修辭)로 전락하고 있다. 부의 불균등 분배로 형식적 기회의 평등은 결과적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때 이무기가 사는 실개천이라도 흘렀지만 지금은 그마저 말라버렸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 날 일도 없어졌지만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겨도 그 용은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서울 강남 부자들이 신랑'신붓감으로 '개천에서 난 용'은 사양한다고 공공연히 떠벌리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재산과 지위가 사람의 됨됨이까지 결정하는, (처칠의 말을 빌리자면) "참으로 한심하고 치졸하고 수치스런 고백이며… 불온하고 역겨운 시대의 징후"다.
두보(杜甫)는 과거에 낙방한 뒤 "아침에는 부잣집 문을 두드리고 저녁에는 살찐 말의 먼지를 뒤쫓는다. 남이 남긴 술과 식은 고기로 때우니 가는 곳마다 슬픔과 괴로움이 사무친다"(朝扣富兒門 暮隨肥馬塵 殘杯與冷炙 到處潛悲辛)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더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1천 년 뒤 과거에 네 번 낙방한 홍수전(洪秀全)은 태평천국(太平天國)으로 세상을 뒤엎으려 했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걷어졌을 때 우리 사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있을까? 그들만의 리그는 사회 전체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하면 입만 아플 뿐이다.
鄭敬勳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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