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순국 100년을 돌아보다] <1>국치의 순간과 자정순국

입력 2010-08-24 09:31:57

한일병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를 따른다"

오는 29일은 1910년 경술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나라를 강제로 잃은 지 꼭 100년을 맞는 날이다. 매일신문과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국치 100년을 맞아 국치의 순간을 되돌아 보고,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온몸으로 표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했던 선비들의 자정순국(自靖殉國)의 의미를 되새기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자정순국 대열에서 앞서 실천했던 향산 이만도 선생을 비롯해 안동 10인의 정신을 되새기려고 한다. 가문이 훼손되고 가정경제가 파탄나는 어려움 속에서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떠났던 안동인들이 한국독립운동사에 남긴 족적을 함께 더듬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910년 8월 29일. 순종은 이날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게 됐다고 발표했다. 순종은 황제 즉위 사흘째 되던 날, 조선 500년 사직을 이어갈 막중한 책임을 자신의 '부덕'을 탓하며 일제에 넘겨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차례 노력했음을 강변했다. 순종은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됐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도저히 만회할 시간이 없고 방책을 찾을 수 없음을 탄식했다.

"스스로 결단을 내려 나라의 통치권을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으로 했다. 그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오늘 짐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순종은 이날 종묘사직을 이렇게 일본제국주의 손아귀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백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한반도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됐다.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 '삼엄한 경비 속 통치권 양여'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이 회의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 이완용을 비롯한 내각대신, 황족대표와 문무원로들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는 일제 데라우치 통감이 사전에 건네준 '한일병합조약안'을 체결하는데 필요한 '전권위임에 관한 조서'에 순종의 재가를 받아내는 자리였다.

이날 순종과 고종의 거처인 창덕궁·경운궁을 비롯해 서울 안팎의 요지에는 약 2천600여 명의 무장한 일본군과 헌병들이 배치됐다. 이들은 30m 간격으로 늘어선 채 두 사람만 이야기하고 있어도 신문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태세를 취했다. 이처럼 계엄과 다름없는 살벌한 상황 아래에서 순종은 전권위임장에 서명했다.

최고 통치자가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않은 채 나라를 통째로 일본에 넘겨주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날 이에 반대하거나 목놓아 우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완용은 순종에게서 받아낸 전권위임장으로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일제는 한국을 강탈한 뒤 한국민의 거센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이를 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 조약을 공포할 예정이었으나 그 다음날이 순종의 황제즉위일이란 점을 고려해 29일 발표했다.

◆나라 위한 마지막 선택, '자정순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를 따른다.' 일제 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한민족의 가장 극렬한 저항이 곧 목숨을 끊는 자정순국이었다. 경술국치 과정에서 전국 7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절했다. 음독하거나 목을 맨 이도 있었으며 물과 음식을 끊어 '단식'이라는 가장 처절한 항거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 침략과 강점의 부당함, 결코 정신만은 침범하지 못할 것이란 의지, 남은 이들에게 결코 흔들리지 말고 싸울 것을 일깨워주려 했던 '나라사랑 정신'은 고통만큼 강렬하게 전해졌다.

나라 잃은 분노에 전국에서 자정순국이 줄을 이었고, 1910년에만 38명이 순절했다. 이 가운데 안동인 향산 이만도의 자정순국은 동은 이중언 등 안동인들의 순국의 물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안동인 김대락과 이상용, 김동삼 선생이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 남부여대(男負女戴)의 행렬을 이끌고 만주벌판으로 떠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향산은 "을미년 국모 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늑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며 단식을 실천했다. 동은도 경고문(警告文)으로 '한 목숨 바쳐 의로움을 세울터이니 나라가 무너졌다고 쉽게 꺾이지 말고 뜻을 세워 맞서 싸울 것'을 동포들에게 전했다.

◆100년 후 지금, '역사 바로잡기 움직임'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이달 10일 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지금까지의 일본 사죄성명 가운데 가장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다. 하지만 한일병합조약에 대한 '원천무효'나 '불법적으로 이뤄졌다'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강제 체결에 대한 부분도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인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는 말로 교묘히 피해갔다.

이에 앞선 5월 10일 '한국병합 100년에 즈음한 한일지식인 공동성명'이 200여 명의 이름으로 발표된 것은 큰 의미였다.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은 일제의 침략과 강점, 통치가 불법이었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살벌한 경비 속에서 강제로 맺어진 조약도 불법이라고 천명했다. 100년을 맞아 한일 양국의 새로운 시대를 위한 정확한 인식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김희곤(안동대 교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일본은 아직도 '일제'를 안고 가고 있기 때문에 한국민들은 만족할 수 없다"며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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