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졸중 완벽 협진 심혈…지역 최초 집중치료실 만들어
"힘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보람을 느끼죠. 의사라는 직업은 그런 점에서 참 매력적입니다." 영남대병원 신경과 이세진(48) 교수는 뇌졸중, 특히 뇌경색 전문이다. 뇌혈관이 막혀 신체 일부의 마비가 오고, 심한 후유증과 우울증을 겪는 환자들을 많이 접한다. 뇌경색이 온 순간 이미 의학적인 완치는 불가능하다. 손상을 최소화해 가급적 후유증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
◆슈바이처를 꿈꿨던 의학도
어릴 적 그의 집은 농사를 짓고 닭을 키웠다. 그는 수의사가 되고 싶었다. 대입 시험을 칠 때까지도 수의사를 꿈꿨지만 농업 분야를 전공한 형들은 "너만은 다른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얼떨결에 의대생이 됐지만 목표가 필요했다. 무의촌 시골 의사를 꿈꿨다.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슈바이처처럼 누군가를 돕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부자나 거지나 환자는 마찬가지다. 네가 어디에 있으나 환자를 도울 수 있다면 충분하다." 너무 한 곳만 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비록 뇌졸중 분야에서 알아주는 전문가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다. "걷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항상 남는 거 아닙니까. 시골 의사가 되기 위해 동아리 활동도 하고 구체적인 목표도 세웠어야 했는데…."
처음 신경과를 전공하겠다고 택했을 때만 해도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전문의를 딴 뒤 공중보건의로 갔지만 불러주는 병원이 없어서 전남 진도까지 가게 됐다. 2년간 오지 근무를 마치고 마지막 1년은 가까운 곳에서 근무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찾아주는 병원이 없어서 지인에게 부탁해 구미의 한 병원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신경과에서 다루는 분야는 뇌졸중, 간질, 두통, 어지럼증 등이 있다. 1996년 영남대병원 신경과에 교수로 왔을 때 선임 교수 2명은 말초신경질환과 치매를 주로 다뤘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뇌졸중을 다뤄야 했다.
뇌졸중은 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로 나뉜다. 뇌경색은 뇌졸중의 80%가량을 차지한다. 뇌경색은 첫 3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혈전을 녹여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혈전용해제를 3시간 안에 정맥에 투여해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
"2시간 이내에 병원에 와서 3시간 이내에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시간이 생명이다. 오죽하면 미국에선 '시간이 곧 뇌'(Time is Brain)이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3시간 안에 병원에 오는 환자의 비율은 3%도 채 안 된다. 그만큼 시간이 촉박하다는 뜻이다.
◆지역 최초로 동맥 혈전용해술 도입
이 교수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동맥 혈전용해술'을 시작했다. 국내에서 처음 서울 세브란스병원이 도입했을 때 1년간 연구강사로 있으면서 시술을 배웠다. 사타구니부터 뇌경색을 일으킨 뇌혈관 부위까지 도관을 집어넣어 직접 혈전용해제를 주사하는 방법. 종전 정맥에 약물을 투여한 뒤 혈전이 녹는지 가만히 지켜봐야 하는 것과 달리 훨씬 적극적으로 혈전을 녹여내는 시술법이다. 다만 뇌혈관 영상을 보며 도관을 삽입하는 영상의학과 의료진과 완벽한 협진이 이뤄져야 한다. 6시간 내에 시술하면 훨씬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뇌경색으로 심한 마비가 온 환자에게 동맥 혈전용해술을 했더니 2, 3일 만에 마비가 풀리고 증상이 호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까울 때도 많다. 혈전 때문이 아니라 혈관내 박리나 심장 문제로 뇌경색이 온 경우, 쉽게 진단이나 치료를 할 수 없다. 40대 초반의 한 가장이 갑작스런 뇌경색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는 경우도 봤다. 재활을 통해 일상생활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직업활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부인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가정은 한순간에 불행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의사로서 한계도 많이 느낍니다. 의료적인 한계죠. 후유증에 시달리는 환자는 가족과도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외롭고 힘들죠. 입원 환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젊은 의사들은 회진 돌 때 워낙 바쁘다 보니 환자들이 다른 말을 하는 걸 막지만 저는 그러지 말라고 합니다. 고통을 나누진 못해도 공감하려고 노력합니다."
환자와 다툴 때도 있다. 장애진단서 발급 때문이다. 발병 6개월 후 후유증을 판단해 장애등급을 정하는데, 높은 등급을 받으려고 어처구니없이 행동하는 환자도 가끔 있다. "평소 재활치료 덕분에 잘 걸어다니던 환자가 장애등급을 받을 때면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옵니다. 진료기록이나 간호사에게 물어보면 충분히 걸을 수 있는데도. 이럴 때면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합니다."
제자와 후배 의사들에게 "환자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의사가 되라"고 곧잘 말한다. 의술이 뛰어난 의사보다는 환자를 제 가족처럼 성실과 진심으로 대하는 의사가 되라는 뜻. 삶의 용기가 꺾인 환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의사는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영남대병원 뇌졸중집중치료실 개설
뜬금없지만 "갑자기 10억원이 생기면 뭘 하겠냐"고 물었다.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낡은 아파트에서 이사를 가는 정도…." 연방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눈만 껌벅였다. 그러더니 "100억원 정도면 뭐 할 만한 게 있겠죠"라고 했다. 뇌졸중 전문병원을 짓고 싶다고 했다. 보다 오랜 시간 환자를 돌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종합병원의 병상이 부족하다 보니 대개 뇌경색 환자는 일주일 만에 퇴원해야 한다. 환자는 지속적인 진료를 원하지만 밀린 환자가 많아 그럴 수만도 없다. 그럴 때면 늘 안타까움이 앞섰다.
100억원의 꿈은 이룰 수 없다고 해도 이 교수는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냈다. 1999년 지역 최초로 경동맥성형술도 시작했고, 2005년엔 경동맥클리닉도 개설했다. 경동맥내막절제 수술은 서울의 4개 병원을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실적이다. 2003년엔 삼성의료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뇌졸중센터를 만들었으며, 2008년엔 지역에서 최초로 신경과, 신경외과, 재활의학과, 영상의학과 등이 협진하는 뇌졸중집중치료실을 개설했다. 많은 환자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완벽한 협진을 통해 최적의 치료법을 제공하기 때문.
환자 상태가 호전돼 고맙다는 말을 들을 때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면서 미안하고 고마워진다. "양심과 원칙대로 진료했을 뿐인데 고맙다고 말해 주니 오히려 제가 고맙죠." 인터뷰가 끝난 뒤 이 교수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참 재미없는 사람이죠? 별로 극적인 이야기도 없고…." 참 담백한 사람이다. 언젠가 그가 활동하는 아마추어 중창단 '까모'(Camo)의 공연을 보고 싶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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