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피랑'은 경남 통영 중앙시장 뒤쪽 언덕에 있는 작은 마을로 통영을 대표하는 관광명소다.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인 '동피랑'에는 사람들을 불러모을 만한 특별한 관광자원이 없다. 그런데도 매년 수만 명이 이곳을 다녀간다. 이유는 벽화 때문이다. 동피랑 마을에 들어서면 담벼락마다 그려진 형형색색의 벽화가 아기자기한 매력을 발산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벽화가 그려지기 전 '동피랑'은 철거 예정지였다. 통영시는 낙후된 마을을 철거하고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지명의 유래(동쪽 벼랑에 자리한 마을)처럼 '동피랑'의 운명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푸른통영 21'이라는 시민단체가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국 각지에서 미술학도들이 몰려들어 골목 곳곳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허름한 달동네가 바다를 품은 멋진 벽화마을로 새로 태어나면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자 통영시는 마을 철거방침을 철회했다. 벽화가 마을을 살린 셈이다. 주말이면 '동피랑'에는 카메라를 든 여행객들로 넘쳐난다. 대단해 보이지 않는 벽화가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힘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곳이 '동피랑'이다.
벽화 그리기를 통해 침체된 지역을 활성화시키려는 움직임이 대구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계명대가 성서로 이전하면서 침체되기 시작한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인근에서 상권을 살리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 사실 벽화 그리기는 전국적으로 많이 전개되고 있다. 계명대 대명동 사례가 이목을 끄는 이유는 기존의 벽화 그리기와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동안 실시된 벽화 그리기가 대부분 행정기관 또는 작가들의 제안으로 시작된 반면 계명대 대명동 사례는 주민이 먼저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성공 여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아, 옛날이여…
이달 11일 오후,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정문 인근에 위치한 분식골목. 한때 학생들로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감돈다. 방학기간이라 드문드문 보였던 학생들조차도 찾기 힘들다. 분식골목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빈 점포들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빈 점포 사이로 몇몇 음식점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임대'라는 커다란 글씨가 시야에 포착됐다. 건물 주인은 7월부터 부동산에 이야기를 하고 '임대'라고 써붙여 놓아도 연락이 없다고 했다.
계명대가 성서로 옮겨가기 전 이곳은 대구에서도 손꼽힐 만큼 잘나가는 상권이었다. 한 건물주인은 30평 규모의 상가 임대료가 보증금 5천만원에 월 130만원이었고 권리금도 수천만원에 달했다고 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단과대별로 조금씩 진행된 캠퍼스 이전 사업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상권도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손님이 줄자 하나 둘 폐업하는 상가들이 늘어났고 임대료도 매년 내려갔다. 급기야 권리금이 사라졌고 보증금도 500만원에 월 30만원이라는 조건을 내걸어도 30평 상가 임대자를 구하기 힘든 상황까지 발생했다.
현재 상인들이 떠난 자리는 계명대 미대 학생들이 메우고 있다. 임대료가 싸다 보니 작업실로 상가를 많이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영업을 하고 있는 상가도 마땅한 대책이 없어 문만 열어 놓은 곳이 많다. 한 상인은 "큰 도로를 접하고 있는 쪽은 안쪽보다 사정이 낫다. 하지만 그곳도 큰 이익은 내지 못한다. 적자를 보지 않고 영업을 하고 있는 수준이다. 지금 남아 있는 미술대·미디어아트대·패션대마저 성서로 이전하면 어떻게 될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더욱 드문 후문 쪽은 사정이 더했다. 후문 담벼락을 따라 따닥따닥 붙어 있는 10여 개의 상가 가운데 현재 영업을 하고 있는 곳은 두 곳뿐이다. 나머지는 장사가 안 돼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간판만이 덩그렇게 남아 사람 떠난 빈자리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대구의 동피랑을 꿈꾼다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인근 지역을 살리려는 움직임은 3층 상가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곽명숙(38·여) 씨가 중심이 돼 추진되고 있다. 곽 씨는 2년 전 계명대 미술대 교수가 학생들에게 내 준 상가 간판 정비에 관한 과제를 보고 지역 활성화 방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풍으로 꾸며 놓은 경기도 파주의 프로방스마을을 다녀오면서 문화의 힘을 빌리면 상권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곽 씨는 "프로방스마을이나 통영 동피랑마을은 크게 볼 것이 없다. 그곳에 비하면 계명대 대명동 지역은 활용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 최근 공연문화거리로 지정되면서 소극장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예술인들의 작업실도 많기 때문에 사람들을 유인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구시민 아이디어 공모에 참가해 금상을 수상할 만큼 곽 씨의 구상은 이미 가치를 인정받았다. 곽 씨는 "건물 외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계명대 미대 학생들의 작품을 상시적으로 전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분식골목을 문화골목으로 꾸미면 서울의 홍대골목이나 삼청동 카페골목 부럽지 않은 명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의 과제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 인근 지역이 동피랑마을처럼 바뀌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우선 건물주나 세입자들의 의견을 한 데 모으는 일이 시급하다. 현재 분식골목에 있는 상가 건물주 또는 세입자 가운데 곽 씨의 취지에 공감해 동참 의사를 밝힌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참여에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많다. 곽 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건물주, 세입자들을 만났지만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특히 돈이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곽 씨는 "학생들이 떠났는데 그림 그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든데 비용을 부담하기 힘들다. 상권이 되살아나면 임대료가 올라가는 부정적인 효과도 나타날 것이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여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실정이다.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한 지 1년이 넘었지만 거북이걸음처럼 일의 진척은 더딘 편"이라고 설명했다.
곽 씨는 아이디어 공모 금상 수상을 계기로 대구시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 방안도 타진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아이디어 공모를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채택을 했으면 실행 가능하도록 지원을 해주는 것이 맞다. 분식골목 전체 상인들이 함께 일을 추진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뜻맞는 사람들 위주로 사업을 추진해 볼 생각이다. 한두 곳이 바뀌면 주변도 따라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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