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이유

입력 2010-08-11 08:46:22

대학시절, 늘 마음에 품고 있던 서울의 모 대학으로 편입을 하기 위해 가족들과 의논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은 형편이 좋지 않으니 졸업 후 대학원을 그리로 가라는 말에 편입을 포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막상 시험을 치려니 자신도 없고 다시 공부를 한다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정형편상'이라는 이유는 내 포기를 위로할 만한 적절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남자친구와 크게 다투고 난 후 몸이 아팠을 때 나를 걱정하는 그에게서 사과를 얻어낸 적이 있다. 그 후 남자친구와 다툴 때마다 몸이 아팠고 누구의 잘잘못이 판가름나기 전에 그는 사과를 했다. 얼마나 상심이 컸으면 몸까지 아프겠느냐며 그는 자신을 책망했지만 실은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몸이 아픈 쪽이 사과를 얻어내기에 훨씬 손쉽고 효과가 빠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 통학길이 진저리쳐졌던 나는 항상 아버지의 차를 넘겨다 보며 병에 걸리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그리고 바람처럼 큰 병을 얻었을 때, 그럼에도 아버지가 차를 태워주지 않자 아버지의 차를 단념하게 되었고 그 후 거짓말처럼 병이 나은 적이 있다.

삶의 대부분의 이유들은 진실이 아닌 듯하다. 내가 가졌던 병도, 간절하다 여겼던 꿈도, 그리고 포기했던 이유들도 모두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항상 위기를 모면하게 하기 위해 병을 만들어 냈고 변명할 정도로만 이유를 찾아냈다. 무언갈 원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은 포기하기를 더 원했다. 그게 훨씬 편하고 쉽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포기하고 싶은데 누군가 포기해야 할 이유를 말해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리고 더 이상 적당한 이유를 마련할 수 없을 때는 병에라도 걸려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이해받을 수 있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황 탓으로 돌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했던 대부분의 상황들이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잠재의식 속의 깊은 의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했다. 그리고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며 착각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변명과 이유만이 나를 안심시키는 유일한 도구였기에 나는 많은 포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내가 않았던 병은 병명을 알 수 없었다. 걷기만 해도 숨이 차고 다리가 떨리는 이상한 병이었다.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앓고 있는 병, 하지만 원하는 장난감을 선물 받게 되면 씻은 듯이 낫는 병, 또한 그럼에도 장난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저절로 치유되는 병, 내가 앓았던 병은 바로 그런 병이었다.

김계희(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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